-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차미혜 사진 / 난다 / 201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신작이 출간되었다.

무척 좋아하는 작가라서, 매번 새 작품을 기대하고, 이미 씌여진 작품을 다시 읽고, 아직 읽지 못한 작품을 책장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꽂아두고 아끼며 읽기를 미루게 된다.

아직 읽을 작품이 남아있다는 데서 오는 아이러니한 안도감이랄까.

이 책도 사면서 나중에 읽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예약판매가 뜨자마자 주문했다.

그 사이 작가는 유명한 상을 하나 수상했고, 언론은 새삼스럽게 그녀를 조명했다.

그 새삼스러움이 작가에게는 참 안어울리는 구나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났다.

생각난 김에, 포털창에 한강이라는 이름을 쳐보았는데, 수상 소식을 제외하면 여전히 김포한강아이파크나, 한강 둔치 주차장 같은 것들이 상위에 자리한다.

이것도 역시 뭔가 되게 그답게 느껴져서 또 한번 웃음이 난다.

<흰>이라는 책은 그 자체로 작가와 닮은 듯하다.

작가에게 색이 있다면 바로 이 색일것이라는. 가만가만 차분한 목소리도 어쩌면 흰 색의 목소리같다는.

읽는 내내 마음이 차분해지고, 순식간에 읽어버린 몰입도도 있고.

그 고요한 흰 색들 안에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돌풍도 있다.

미처 날이 밝아오기 전 새벽에 읽기 아주 좋았다.

익숙하고도 지독한 친구 같은 편두통 때문에 물 한 컵을 데워 알약들을 삼키다가 (담담하게) 깨달았다. 어딘가로 숨는다는 건 어차피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 11

누군가가 - 아마 그동안 이 집에 세들었던 사람들 중 하나가 - 송곳 같은 날카로운 것으로 그 문의 표면을 긁어 숫자를 기입해놓았다. 획순을 따라 나는 곰곰이 들여다보았다. 세 뼘 크기의 커다랗고 각진 3. 그보다 작지만 여러 번 겹쳐 굵게 그어 3보다 눈에 먼저 들어오는 0. 마지막으로 가장 깊게, 온힘을 다해 길게 긁어놓은 1. 난폭한 직선과 곡선들의 상처를 따라 검붉은 녹물이 번지고 흘러내려 오래된 핏자국처럼 굳어 있었다. 난 아무것도 아끼지 않아. 내가 사는 곳, 매일 여닫는 문, 빌어먹을 내 삶을 아끼지 않아. 이를 악문 그 숫자들이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얻으려 하는 방, 그 겨울부터 지내려 하는 방의 문이었다. - 15

엉망으로 넘어졌다가 얼어서 곱은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서던 사람이, 여태 인생을 낭비해왔다는 걸 깨달았을 때, 씨팔 그 끔찍하게 고독한 집구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게 뭔가, 대체 이게 뭔가 생각할 때 더럽게도 하얗게 내리는 눈. - 54

상처가 없는 발이어야겠지, 사진을 들여다보다 그녀는 생각했다. 곱게 아문 두 발이라야 거기 얹을 수 있다, 그 소금 산에. 아무리 희게 빛나도 그늘이 서늘한. - 68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 83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말을 모르던 당신이 검은 눈을 뜨고 들은 말을 내가 입술을 열어 중얼거린다. 백지에 힘껏 눌러쓴다. 그것만이 최선의 작별의 말이라고 믿는다.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 - 128

2016. M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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