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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재밌고 나름 감동적이다..라는 감상으로 기억되는 책.
재미는 확실할 것이라는 장담 한마디 남기기도 했던 책.
리뷰를 써야하니 다시 읽어야 했던 책.
글자가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심란한 나날을 보내다 결국 뒤늦게 읽은 책.
분명 깊은 인상을 남긴 책이었는데,
다시 읽고나서는 뭔가 선뜻 글이 써지지 않았다.
왜지?
분명 잘 구축된 세계 안의 감동스러운 이야기인데, 감흥이 예전만 못했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게 된건지 그 이유를 찾아내기 힘들어서 리뷰는 점점 더 쓰기 어려워진다.
불편한 구석이 있는 거다.
창녀의 아이들을 맡아 키우며 돈벌이를 하는 노쇠한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전직 창녀.
유색인이며 이교도로 사회 하층민으로 분류되는 이웃.
그 안에서 자라나 일찍 부터 인간의 존엄에 대한 감수성이 자란 아이 모모.
이들 모두가 불편했다.
전에도 어느 정도 불편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이 더 그렇다면 나의 무엇이 달라진 것인지 그것에 대한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이 책 `하나`만을 놓고 이야기를 하는게 점점 더 어려워진다.
주위를 따뜻하게 돌볼 줄 아는 아이임에 분명한 모모에게서 언뜻 언뜻 비치는 내재된 폭력성이 불편하고,
하층민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체념(이라 단정하는 것이 실례일지도 모르지만)도 불편하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처럼 그들이 단결하여 분연히 일어선다면 그것은 어쩐지 블랙 코미디처럼 느껴질 테지만,
현실에 순응한 이들의 삶이 처연하면서 못마땅하다.
쓰다보니 알겠다. 그들이 순응하는 비루한 현실이 야만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유려한 언어를 구사하고, 불이나 전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고, 인문철학적으로 고고한 세계를 구축한다고
야만이 벗어지는 것이라면, 이 이야기는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은 인간으로 말미암은 야만, 전쟁과 살육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낙오되어 야만의 세계로 굴러 떨어진 이들은 공인되지 못한 비유럽인, 소수자들이다.
전에 이 이야기가 전쟁을 지나온 생존자들의 삶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한다고 나는 여지껏 착각해 온 것같다.
아니지... 착각은 아닐 것이다. 그것도 이 이야기의 엄연한 축이니까.
그런데 난 왜 아직도 마음이 불편한가.
나이를 먹을 수록 점점 프로 불평러가 되어가는 나는 다시 만나는 이 이야기의 꼬투리를 잡지 못해 안달이 난것일까.
내가 잘못한것 같다.
나를 바꿔야 하나.
리뷰가 아닌 푸념으로 변질 되버리고 만다.
2016. Ap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