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과 상처 - 김훈 기행산문집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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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이나 남성적인 언어.

그게 예스럽고 멋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쩔수 없는 거부감도...

그러나 사유는 깊고 언어는 아름답다.

숨을 곳이라고는 아무곳도 없었다. 그 관능의 등불이 자전하고 공전함에 따라 이 세계 위에는 새로운 낮과 밤과 계절이 드나드는 듯했다. 꽃잎들은 속수무책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것들의 삶은 시간에 의하여 구획되지 않았다. 그것들이 시간 속에서는 태어남과 절정과 죽음과 죽어서 떨어져 내리는 시간이 혼재 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태어나자마자 절정을 이루고, 절정에서 죽고, 절정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이어서 그것들의 시간은 삶이나 혹은 죽음 또는 추락 따위의 진부한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어떤 새로운, 절대의 시간이었다. 꽃잎 쏟아져 내리는 벚나무 아래서 문명사는 엄숙할 리 없었다. 문명사는 개똥이었으며, 한바탕의 지루하고 시시껍적한 농담이었으며, 하찮은 실수였다. 잘못 쓰여진 연필 글자 한 자를 지우개로 뭉개듯, 저 지루한 농담의 기록 전체를 한 번에, 힘 안 들이고 쓱 지워버리고 싶은내 갈급한 욕망을, 천지간에 멸렬하는 꽃잎들이 대신 이행해주고 있었다. 흩어져 멸렬하는 꽃잎과 더불어 문명이 농담처럼 지워버린 새 황무지 위에 관능은 불멸의 추억으로 빛나고 있었다. - p. 10

2015. F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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