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민음의 시 337
김이듬 지음 / 민음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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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로 오해할 수 있었지만
체념과 처연함이 담긴 세상에 대한 사랑이 담겨있다.

그게 몹시 쓸쓸하다.
그래도 어느 덧 봄이 되어 있다.

- 오래도록 어둡고
우울한 음악을 들었다
그러다 거대한 불에 휩쓸렸다
올해
봄날은 잿더미
암흑세계였다
생체발광할 수 있다면
차가운 빛을 만들 텐데
더듬어 시를 켰다
절벽이 보였다 - 자서

- 나는 약이라고 부르고 시계방 주인들은 알 혹은 배터리라고 부르는 이 작고 둥근 것을 매만진다 다 닳은 세계를 손바닥에 놓고 본다

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의 차이는 뭘까
모두 끝났다고 말해도 될까
이 세상에 원래 없었던 것 같은
그것을 찾아 나는 어딜 이토록 떠도는 것인지 - 이 세상에 없는 것 중

- 처음 듣는 음악처럼 귀에 들어온다
네가 올 거니까
새벽은 더 이상 푸른 절벽이 아니고
밤은 더 이상 미완의 종말이 아니다 - 에튀드 중

- 순식간
가벽 너머에서 만발한
꽃향기가 넘쳐 왔다

세상의 모든 꽃이 일제히
내 감은 눈앞에서 피어났다

쉽게 만족하는 나한테서
시무룩하게 너는 뒤처져 걸었다 - 봄, 비, 공원 중

- 나한텐 그림이 전부야
세상이 어두워서 어두운 그림만 그렸는데
이젠 그림이라도 밝게 그리기로 했어 - 현기증 중

- 거머쥔 것이 태도를 형성한다 - 귤 따기 체험 중

- <쪽에서 쪽빛을 얻기까지>

세상이 꽃밭이라면 나는 꿀벌이 아니라 말벌이었겠지.

다행히 네가 사랑하는 세상이 풀덤불 가시투성이라서, 나는 두 발로 뛰어다니네.

너는 수수만년 혹독한 밤을 지난 것 같아. 그래서 즐거운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사람, 내가 근처에 왔다가 들렀다고 말하면 믿어 주는 친구.

쪽풀을 뜯는 네 뒷모습 보다가 나는 항아리를 씻네. 네가 푸르죽죽하게 쪽물 밴 손바닥을 내밀며 어서 가라고 말하기 전에 내 손바닥 펼쳐 잿물을 젓네.

이렇게까지 번거롭게 색깔을 만들어야 할까, 촌스럽게 유행에 너무 뒤떨어지는 거 아냐? 이렇게 쏘아붙이지 않을 만큼 내 감정이 간결해진 걸까.

물감 이전에 천연염료가 있었다고, 항아리 이전에 흙이 있었다고 네가 말하는 소리가 좋아서 나는 속뜻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기로.

네가 내 삶을 구하러 온 친구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있는 그대로 네 빛깔이 좋아.

친구는 나를 툭툭 치며 마구 구겨지고 더러웠던 내 마음을 밟는다. 커다란 대야에 넣어 밟아 빠는 흰 광목천처럼 나는 너의 색깔을 담을 준비가 되었다.

- 어금니가 한 개 없고 잇몸도 나쁘다
나는 혼자 충분히 늙었다
이렇게 살다가 고독사할 게 자명해
탄식을 주워섬기는 너는 내 안의 방랑자
우리는 불화한다 - 나의 이방인 2

- 지금이 가장 불행한 시절일 것도 같은데
남은 날들이 별로 길 것 같지 않은데

슬픈 농담인지
고맙다
행복하다고 한다

살아남은 목숨들은
생에 깊이 사무친다

속절없이
사랑한다 - 초봄 대피소 중

- 눈을 깜박하는 사이 오십 년이 지났다고 한다 이 슬픔이 전부일까 두 사람은 우물거리며 내게 길을 보여주었다 나는 따라가지 않았다 - 재에 몸을 묻고 중

-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미움이 없어 분노가 없어 관심과 눈치도 없이 봄이 지나갔다 지나고 보니 봄이었다 -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중


2026. mar.

#아무도미워하지않고한계절이지나갔다 #김이듬 #민음사 #민음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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