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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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백석을 상상하다.

결말을 알고 있으니 가망 없는 그의 미래에 암울하기만 하지만, 문득 마주치는 문장의 아름다움에 삶이 서글프다고 느껴진다.

흔적처럼 남아 있는 시인의 자취를 쫓는 시선에 안타까움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 그렇게 양자택일만 남아 있는 것일까? 다른 길은 없을까?
기행이 물었다.
우리의 불행은 거기서 시작됐지. 제3의 길이란 없다는 것. - 31

- 이제 인생은 매사에 벨라에게 질문을 던졌다. 인생의 질문이란 대답하지 않으면 그만인 그런 질문이 아니었다. 원하는 게 있다면 적극적으로 대답해야 했다. 어쩔 수 없어 대답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 역시 하나의 선택이었다. 세상에 태어날 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그러므로 그건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리고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져야만 했다. 설사 그게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일지라도. 벨라는 호숫가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섰다. - 38

- "저 역시 시를 썼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말들은 제 안에서 점점 지워지고 있습니다. 음식 이름들, 옛 지명들, 사투리들...... 폐허에 굴러다니는 벽돌 조각들처럼 단어들은 점점 부서지고 있어요."
그 위에 새로운 사회주의 공화국의 시들이 건설되고 있었다. 새로운 시들은 공장에서 미리 제작한 벽체를 올려 아파트를 건설하듯이 한정된 단어와 판에 박힌 표현만으로 쓰였다. '우리는 자랑한다 조선 로동계급의 이름으로/ 프로레타리아 국제주의 기치를/ 그 기치 아래 손잡아 떨친/무진하고 무적한 위대한 힘을!'이라고 노래하고 또  '나는 다시금 느낀다./ 로력의 성과가 얼마나 큰가를/ 영웅의 땅 이런 나라에 산다는 행복 / 심장 속에 싱싱 푸르러감을'이라고 외치는 시들. 거기에 가무락조개, 나줏손 귀신불, 이랑, 양지귀, 개포가 같은 말은 들어갈 수 없었다. 새 공화국의 젊은 시인들은 기행의 시가 낡은 미학적 잔재에 빠져 브르주아적 개인 취미로 흐른다고 비판했다. 그들은 기행에게 어렵게 쓰지 말라고, 개성을 발휘하지 말라고, 문체에 공을 들이지 말라고 충고했다. - 162

- 벨라가 말했다.
"나는 1924년에 세상에 태어났고, 그 세상에는 늘 나보다 먼저 죽는 것들이 있었어요. 내게 전쟁이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죽이는 일이었어요. 전쟁은 인류가 행할 수 있는 가장 멍청한 일이지만, 그 대가는 절대로 멍청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나요? 전쟁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평화를, 상처를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회복을 노래할 수 있나요? 전 죽음에, 전쟁에, 상처에 책임감을 느껴요. 당신 안에서 조선어 단어들이 죽어가고 있다면, 그 죽음에 대해 당신도 책임감을 느껴야만 해요. 날마다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아침저녁으로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러지 않으면 제대로 사는 게 아니에요. 매일매일 죽어가는 단어들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게 시인의 일이에요. 매일매일 세수를 하듯이, 꼬박꼬박." - 164

- 수령이 문학에서 낡은 사상 잔재를 반대하는 투쟁에 나서라고 교시를 내린 뒤, 전국의 도서관과 도서실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이 소장 중인 책들 가운데 반당 반혁명 작가의 책들을 회수해 공개적으로 불태우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거기서 불타는 한 권 한 권은 저마다 하나의 세계였다. 당연히 서로의 주장은 엇갈리고, 지향점은 다르고, 문체는 제각각이다. 그렇게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이고, 현실은 그 무수한 세계가 결합된 곳이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세계가 있고, 또 추악한 세계가 있다. 협잡이 판치는 세계가 있고, 단아하고 성실한 세계가 있다. 어떤 세계는 지옥에, 또 어떤 세계는 천국에 가깝다. 이 모든 세계가 모여 다채롭고도 영롱하게 반짝이는 빛을 발하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 한 권이 불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인 한 명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현실 전체가 몰락하는 것이다. 당과 수령, 그리고 그들의 충실한 대리인인 병도는 자신들이 조립한 언어의 세계만이 리얼하다고 말하지만, 수많은 세계를 불태우고 남은 단 하나의 세계라는 점에서 그들의 현실은 한없이 쪼그라들다가 스스로 멸망하리라. 언어와 문자는 언어와 문자 자신의 것이다. 그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리얼리즘이란, 그런 언어와 문자가 스스로 실현되는 현실을 말한다. 거기에는 당과 수령은 물론이거니와 기행의 자리마저도 없는 것이다. - 190

- 기행은 앞에 선 그녀를 올려다봤다. 앉아서 올려다보기 때문인지, 그 자신만만한 태도 때문인지 그녀는 기행보다 훨씬 더 큰 사람처럼 보였다. 서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행을 내려다봤다. 그러더니 사람들로 북적대는 혜산역 대합실 한켠에서, 어떤 두려움이나 부끄러움도 없는 선한 표정으로 그녀는,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라며 시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그런 곳에서, 오래전에 잊어버렸던 시를,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듣게 되니 그의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랐다. 여학생 시절, 국어 선생을 따라 외웠다는 그 시의 한 음절 한 음절은 쇠도끼 날처럼 그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우연히 만난 시인 앞에서 그의 시를 욀 줄 안다고 자랑하고 싶은 그 높은 자부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쓸쓸히 앉어'라든가 '소주를 마시며' 따위의 비관적이고 퇴폐적인 문장을 저토록 큰 소리로 말하는 철없는 입술을 만류하기도 전에, 기행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갑자기 낯설어졌다.아니, 비로소 그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제대로 인식하게 된 것이랄까. 타오르는 갈탄의 힘으로 한쪽 표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난로며, 좀체 귀에 와닿지 않는 변방의 사투리며, 도내에서도 손꼽히는 축산반을 자랑한다는 협동조합을 찾아간다는 사실 등등이 모두. 그때 그는 눈이 푹푹 나리는 밤 안에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 안에 있었다. 그 밤과 마음이 지금 그와 함께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이나 대합실 바닥을 내려다봤다. 미래나 과거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와 시골 사람들의 솜 신에서 녹아내린 물로 바닥이 검게 물드는 혜산 역 대합실에 떨어진 사람처럼, 멍하니.
"그래서 삼수까지 오신 게 아닙니까?"
그 말에 기행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거기 인민학교 교원 서희가 서 있었다. 앞의 말을 듣지 못했기에 기행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자, 그녀가 재차 설명했다.
"그 시에 이미 쓰시지 않았습니까?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 말에 기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보니 교원 동무가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런 시는 쓸 능력도 없는 사람이올시다. 나그네를 배려하는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협동조합은 제가 알아서 찾아갈 테니 신경 안 써도 되겠습니다. "
"아까 시인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동무가 잘못 들은 모양이오. 작가동맹이 나를 조합에 파견한 것은 맞지만, 나는 시를 번역하는 사람이오." - 196

- 다행히도 밤은 길었으므로 기행은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원한다면 평생 써온 시들을 모두 그 노트에 쓸 수 있었다. 그렇게 한 편의 시를 쓰고 쭉 읽은 뒤, 종이를 찢어 난로에 넣고 그 불꽃을 바라보는 일을 반복하다가 그는 노트에 '관평의 양'이라고 쓰게 됐다. 마찬가지로 그 왼쪽으로 글자들이 쭉 떠올랐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는 보이는 대로 받아 적었다. 다 적고 나니 마음에 흡족했다. 그리고 그는 종이를 찢어 난로에 넣었다. 다른 시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으로 쓴 그 시도 포르르 타오르다 이내 사그라들었다. - 207


2024. jul.

#일곱해의마지막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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