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미국 인문 기행 나의 인문 기행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반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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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서의 죄'를 두고 내내 괴로워했던 사람(파트너 후나하시 유코 선생의 말)인 서경식 선생의 마지막 책이 되었다.


더 나빠지는 세계에 대해, 이미 충분히 나빴던 과거에 대해 늘 마음 속 큰 짐을 지고 살았던 학자.

그 어두운 마음이 선생의 일생을 얼마나 힘들게 했을지 충분히 느껴졌다.

인간에 대한 회의감이 가득한 그 마음.


미국 인문기행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세 가지인데, 형들의 구명을 위한 정치적인 방문, 트럼프 당선 직전의 어수선한 시기의 방문, 전 세계적 전염병 시대의 방문이다.

이 세 시기 모두 희망적인 전망을 갖기에는 우울한 시기이고, 냉소와 허무에 빠져있으면서도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킬지는 물어보나 마나 일듯 하다.

재일 조선인으로, 부당한 일을 겪는 가족의 일원으로, 인간에 대한 절망에 괴로워하는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온 선생에게 이제는 안식이 찾아온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존경하는 학자의 죽음을 기리는 마음으로 읽었다.


벤 샨, 에드워드 사이드에 대해 알게 된 점이 소중한 부분.


- '맺음말' 글의 최종판이 도착한 날이 2023년 12월 17일이다. 다음 날 영면하셨으니, 이 책의 맺음말 <'선한 아메리카'를 기억하기 위하여>는 그렇게 선생의 마지막 원고로 남았다. - 여는 글 중


- 그 와중에도 나는 머무르던 도시에서 짬이 나면 혼자서 미술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결사적인 반독재 투쟁이 이어지고 있는 시기였다. 형들은 옥중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런 시기에 걸맞은 바른 처신이었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런 나를 괴이하다 보았을 것이다. 나는 스물네 시간을 투쟁에 바치는 모범적인 활동가상에서는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다만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듯, 좋은 미술 작품과 조우하기를 바라며 떠돌아다니는 일이 내 자신의 생존에 필요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 19


- 8월 21일 아키노가 탄 중화항공 비행기가 마닐라 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세 명의 군인이 진입하여 그를 밖으로 끌어냈다. 직후 총성이 들렸고 아키노는 머리를 맞고 즉사했다. 동행했던 취재진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목격했고 아키노의 죽음을 전 세계에 알렸다. 이렇게 너무나 당당하게 벌어진 살해를 '암살'이라 하는 것은 틀린 말이다. 여러 사람이 보고 있는 대낮에 공공연히 자행된 살인이었다.

나 역시 일본에서 그 보도를 반복해서 보았다. 세계는 피투성이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나 자신도 그런 피바다에 빠져 익사할 것만 같았다. 내가 처음 서양 미술 순례를 떠난 것은 1983년 10월. 아키노 살해 사건으로부터 두 달 정도 지난 뒤였다. 일시적이나마 '다른 세계'로 몸을 옮겨가고 싶었고, 어떻게 해서든 숨을 쉬고 싶었다. 하지만 미술 순롓길에서 닿는 곳마다 나를 끌어당긴 작품 역시 역사 속 잔혹한 장면을 그린 피투성이 그림들이었다. - 59


- 당시 여행 일기를 찾아 꺼내 보니, 반복해서 "지쳤다."라고 써놓았다. - 95


- 동아시아의 제국주의 국가 일본은 근대 이후, '문명화(유럽적 보편주의)'를 구실로 삼아 자기중심적 국가주의(초개별주의)에 입각한 침략을 거듭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일본적 보편주의, 즉 천황제를 최고 가치로 하는 세계 질서를 그들은 '팔굉일우(온 천하가 하나의 집이라는 뜻)'라고 칭했다. 중국과 조선 등 아시아 민족은 이러한 보편주의에 따라야만 한다고 주장하며, 피지배민족의 독립 요구를 '민족주의적 편견'으로 취급하며 탄압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함께 근본적으로 부정당해야 마땅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천황제가 존속되었듯, '일본적 보편주의' 또한 살아남았던 것이다. 코스타리카 대학 강연에서 나는 이 점을 지적했다. - 139


- 나치ㅣ 독일의 잔학함과 냉혹함을 그 증거로 내놓는다 해도 지금은 누구도 진심으로 충격을 받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치 패망 이후에도 이와 동등한 잔혹과 냉혹함이 세계 도처에서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 145


- 예술에 전쟁을 억제하는 힘이 있는지, 나쁜 권력을 타도하는 힘이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하지만 예술은 언제나 어떤 악몽의 시대에도 관용, 연대, 공감을 추구하려는 인문 정신이 살아 있음을 가르쳐준다. 예술에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 157


- "파멸을 향해 갈 운명임을 알고 이"다면서도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거의 승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진실을 말하겠다는 의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치 한 편의 시와 같다. - 233


- 단절된 미국은 쇠퇴의 길을 차근차근 밟으며 전락하는 중이다. 다만 이 단말마의 고통은 오래 지속되면서 수많은 부패와 파괴를 거듭하며 인류 사회에 심대한 손상을 입힐 것이다. 미국이 (그리고 세계가) 변한다는 것은 그 정도로 멀고 험난한 길이다. - 251


- 한국에서 유학 중이던 나의 두 형이 사상범으로 구속, 투옥되어 한 사람(서승)이 군사재판을 받고 한때 '사형'선고까지 받은 시기 말이다. 그는 이후 '무기징역'이 확정되었고, 다른 형(서준식)은 징역 7년을 선고받았지만 전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형기를 채우고도 석방되지 못한 채 20년 가까이 옥중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때 나는 일본에서 정신을 소모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갈피를 못 잡고 좀처럼 잠들지 못하는 밤이 이어졌다. 어두운 방에 누워 '잠을 자야 한다.'라고 스스로를 타일렀지만 귀에선 심장의 고동 소리만 끊임없이 들려왔다. 나는 스스로에게 되뇔 뿐이었다. 아무리 끔찍한 일이라도, 아무리 부조리한 일이라도 이렇게 실제로 일어나버린다고. - 256


- 하루하루 현실에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내 경험의 작은 조각이라도 제시하여 참고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인간 그 자체에 절망하지 않기 위해. 그것이 나의 끝나지 않는 '인문 기행'의 한 페이지다. - 262


2024. mar.


#나의미국인문기행 #서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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