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인생 열린책들 세계문학 275
카렐 차페크 지음, 송순섭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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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인생이라고 보이는 개인의 삶 속에 무한한 우주와 같은 여러 개의 자아들이 혼재하고 그 자아들이 서로 갈등하고 화해하는 것이 인간임을 말하고 있다.

평범한 철도 공무원이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회고록을 쓰게 되고, 사후에 그의 원고를 읽게 되는 오랜 지인.

평범한 그의 일생을 뭐 딱히 기록할 것이 있으랴 생각하고 원고를 읽는 이의 당혹스러움을 독자도 같이 따라가게 된다.
평범하지만 조금 똑똑하고 조숙하게 어린 시절을 보내며 모범생의 얼굴로 살아가던 그는 시라는 세계에 빠져들어 영혼의 자유로움을 경험하지만, 생활을 해나가야 한다는 현실에 타협해 철도 공무원이 되는 길을 택하고, 어느 역장의 딸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순조로운 승진으로 고위 공무원이 되는데,
실은 출세하고자 하는 노림수로 역장의 딸과 결혼을 선택하고, 장인의 도움으로 이른 나이에 역장으로 승진하고, 모범적이고 정숙한 아내와의 관계를 지겨워하는 일면이 있다는 고백이 회고록의 중반 이후부터 서술된다.
노년의 어느 날 시인으로 존재하던 과거의 자신을 찾아온 젊은 친구의 방문에 시 따위가 뭐라고라는 태도로 시큰둥하고 불친절하게 대하지만, 사실 그 시절의 그의 시는 놀라운 발견이라 할 만큼 훌륭한 면이 있었다는 것은 그가 그 평범한 인생을 위해 어떤 잠재력을 등졌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회고록을 써나가면서 자신이 생의 변곡점에서 해왔던 선택들, 자신의 내면이 진실로 원했던 것들, 그런 하지 않았던 일들을 떠올리며 분열적인 자신에 대한 평가를 하는 셈이었다.

한 사람의 평범한 일생. 그 안의 우주를 보여주는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다.

- 노신사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 친구가 죽었어. 그처럼 규칙적인 사람도 해내는 걸 보면 죽는다는 건 아주 평범한 일임이 틀림없겠군. 하지만 분명히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겠지. 아마 삶에 애착이 있었으니까 자서전을 썼을 게야. 그렇게 평범해 보이던 사람도 어느 날엔가는 훌쩍 세상을 뜨게 된다는 걸 누가 알겠나. - 9

- 하지만 인생이란 별난 모험이 아닌 일상적 법칙의 흐름이다. 삶에 나타나는 특이하고 비일상적인 것은 단시 삶의 바퀴가 덜컥거리는 소리일 뿐이다. 오히려 정상적이고 평범한 삶을 찬미해야 옳지 않을까? 덜컥거림이나 비통함이 없고 산산이 부서지지 않았다고 해서 부족한 삶일까? 그 대신 우리는 많은 일을 해냈고,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책임을 완수했다. 나의 삶은 전체적으로 보아 행복했고, 소심하지만 목가적인 삶에서 발견한 조그맣고 규칙적인 행복은 부끄러울 게 없다. - 20

- 모든 것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변한다. 결국 인생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시간이다. - 117

- 나는 쓰는 일을 중지하고 가만히 누워 있으려 했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다시 대화의 단편들이 떠오르고, 두 음성은 어리석은 일의 시비를 가리려고 싸움을 시작한다. 내가 재차 끼어들지 않을 수 없다. 조용히 해. 다투지 말란 말이야. 모두가 진실이다ㅏ. 하지만 사람의 마음속에, 이 평범한 인생 속에도 여러 가지 동기가 존재할 수 있지 않은가? 아주 단순한 일이야. 인간은 이기적이고 태생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생각하기 마련이지. 잠시 그걸 잊고, 자신마저 잊은 채 자기가 몰두하는 일만이 존재할 때가 있는 거야.
가만있어 봐. 그처럼 단순한 게 아니지. 그건 두 개의 전혀 다른 삶이야. 그게 문제라고!
뭐가 문제란 말인가?
둘 중 어느 것이 <진정한 삶>이라는 게. - 150

- 흠, 첫 번째는 평범하고 행복한 사람이고, 두 번째는 출세를 위해 몸부림치는 억척이이고, 이 우울증 환자가 세 번째 인물이지. 유감이지만 그것은 세 개의 삶이고, 서로 다른 존재들이야. 절대적으로, 극단적으로, 근본적으로 다른 삶이지.
그건 전체적으로 볼 때 한 개의 평범하고 단순한 삶이야. - 159

- 지금 너는 고개를 가로젓고 있다. 어쩌면 그 시들은 그렇게 형편없지도 않고, 바보 같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 그시에 대해 기쁨을 가질 수도, 약간은 우쭐해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보라. 이 시들을 내가 썼고, 그다지 나쁘지는 않아. 하지만 너는 매우 슬퍼하고 있지. 심지어 그 호전적인 음성도 들리지 않는다. 그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는 짓이지. 그는 그게 패배의 시기였고, 네가 시인이기에는 재능도 인격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그만두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제 모든 건 전혀 다르게 나타나며, 자신으로부터의 도피이자 네 속에 있던 것으로 함몰하지 않기 위해 느꼈던 공포처럼 보인다. 불구덩이를 막아 버렸고, 괴물이 스스로 질식하도록 만든 것처럼 보인다. 아마 불길은 벌써 꺼졌을 것이다. 이젠 더 이상 손가락에 불이 붙지 않고 손이 뜨겁지 않다. 자신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 너는 일들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그 일을 네 직업이자 생활로 만들었다. 너는 성공했고, 너 자신에게서 벗어나 정상적인 사람이 되어 양심적이고 만족스럽게 평범한 인생을 살았어. 잘 살아온 삶인데 또 뭘 원하는 거지? 뭘 유감스러워하는 건가? - 174

- 보라고. 평범하고 행복한 사람의 이야기는 아주 단순해야 했어. 그런데 온갖 유형의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잖나. 평범한 인간, 억척스러운 인간, 우울증 환자, 시인...... 그들 모두 자신이 나의 자아라고 그래. 그걸로 충분하지 않나? 그저 돌이켜 봄으로써 내 삶을 산산조각 낸 게 아니냔 말일세. - 180

- 대체 얼마나 많은 경우의 인생이 있었던 건가. 넷, 다섯, 여덟? 나의 인생을 구성하는 여덟 개의 삶이 있었다. 내게 시간이 조금 더 남아 있고, 조금 더 맑은 정신이 든다면 일련의 또 다른 삶들을 발견하게 되겠지. 아마도 전혀 연관성이 없고, 단지 일회적으로 일어났거나 한순간 동안만 지속되었던 그런 삶들이 나타나리라. 어쩌면 한 번도 나타나지 못했던 삶들이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른다. - 212

- '가엾은 친구.' 포펠 씨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정원은 조용했지만, 울타리 너머 어디선가에서 어떤 아이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노신사는 생각에 잠긴 채 책의 접혀진 부분을 펴다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그런데 <난> 내 인생에 관해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내 인생은 그의 삶처럼 단순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았소. 의사 선생님은 아직 젊으시니까 인간이 어떤 경험을 하게 되는지 모를 겁니다. 모든 걸 어떻게든 설명하려고 들면 어떤 결론에 도달할는지! 그래요. 그 삶을 살아온 건데, 말이 무슨 소용이겠소. 그리고 선생님도 필히......'
'전 자신의 내면을 뒤져 보는 일 따위에 쓸 시간이 없습니다. 말 뜻은 잘 알겠습니다만,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추악함을 볼 만큼 봤습니다.' 의사가 대꾸했다.
'그러니까 카드점이나 치는 게 낫다는 거군요......' 포펠씨는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 243

2023. dec.

#평범한인생 #카렐차페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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