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러스트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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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적 입장의 기록이 얼마나 역사를 납작하게 보여주는 것인지 새삼 느낀다.

그 일방적 입장은 예외없이 강자의 기록인데, 그 강자는 진정한 강자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하는 이야기다.

베벨인 아이다의 개인적인 경험을 스스로에게 덧입혀 떠드는 장면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결국 마지막 파트만이 모든 사실의 진실에 가깝다고 느끼지만, 그렇기에 입맛이 씁쓸해진다.

해석의 주체가 누구인지와 내가 믿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늘 경계해야 한다는 소소한 교훈.

초반의 지루함이 있었지만, 중반 이후 급속도로 빨려들어가는 이야기다.


- 벤저민은 돈의 뒤틀림에 매료됐다 - 돈을 뒤틀면, 돈이 자기 꼬리를 억지로 먹도록 만들 수 있었다. 투기의 고립되고도 자족적인 성질은 그의 성격과 잘 맞았고, 경이감의 원천이자 그 자체로 목표였다. - 23

- 둘의 신비주의까지 더해지자, 부부는 그들이 절대적으로 경멸하는 뉴욕 사교계의 신비로운 생물이 되었다. 둘의 엄청난 위상은 둘이 보이는 무관심 때문에 더욱 높아져만 갔다. 하지만 그들의 가정생활은 화목한 부부라는 이미지에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았다. 벤저민이 헬렌에게 느끼는 존경심은 경외감에 가까워졌다. - 84

- 사람들은 대부분 각자가 승리에 있어서는 적극적 주체이지만 실패에 있어서는 수동적 객체일 뿐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승리하는 건 우리지만, 실패하는 건 우리가 아니다- 우리의 통제력을 벗어난 힘 때문에 망가지는 것뿐이다. - 88

- 모든 인생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거나 삐걱거리다 멈추게 하는 소수의 사건을 중심으로 정리된다. 다음번의 강력한 순간이 찾아오기 전까지, 우리는 그런 사건들의 결과로 혜택을 보거나 괴로워하며 그런 사건들 사이의 세월을 보낸다. 한 사람의 가치는 자신이 직접 만들어낼 수 있었던, 이처럼 결정적인 상황의 수에 따라 정해진다. 늘 성공을 거둘 필요는 없다. 패배에도 위대한 영광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서사시든 비극이든 결정적인 장면의 주연이어야 한다. - 201

- 이 다이어리와 달력들에서는 그처럼 천진난만하고 어린애 같으며 ‘여성적’이라고 깔볼 만한 그림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이 서류에 따르면, 밀드레드는 결혼하고 일 년 뒤에 은둔에서 벗어나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와 연주자, 지휘자 들과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앤드루가 음악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한들, 그가 적극적으로 음악을 싫어했다 한들, 이건 언급할 가치가 있는 일 아닐까? 자기 아내가 파블로 카살스에서 에드가르 바레즈에 이르는 음악가들을 초대하곤 했다는 사실을 누가 빼놓겠는가? 왜 그녀를 어설픈 취미생활이나 하는 소녀로 그린단 말인가? - 342

- 자서전을 써야겠다는 베벨의 결심은 많은 부분 아내의 오명을 벗기고 그녀가 배너의 소설에 나오는 은둔한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겠다는 바람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이글을 읽어보니, 베벨은 밀드레드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보다 그녀를 완전히 특징 없고 안전한 인물로 바꿔놓는 것을 더 원했던 것 같다. - 베벨의 목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내가 당시에 읽었던 위대한 남자들의 자서전에 나오는 아내들과 똑같이 말이다. 밀드레드를 그녀의 자리로 돌려놓으려고. - 346

- 나는 이 방 저 방을 오갔다. 이곳은 남편에게 “가정을 만들어준” 사람의 “부드럽고” “따뜻한” 공간이 아니었다. 연약한 어린 신부가 사는 곳이 아니었다. 집안의 나머지 공간과 대조를 이루는 이곳에는 수도원 같은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 돌이켜보면, 나는 그것이 현대적이고 진정으로 전위적인 분위기였다고 생각한다. - 383

- 그런데 지금 베벨이, 내 얼굴에 대고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는 직장에서든 사생활에서든 무수히 많은 남자들이 내 아이디어를 자기 것인 양 내 앞에서 되풀이해 말하는 경험을 했다 - 처음에 그 생각을 떠올린 사람이 나라는 걸 내가 기억하지 못할 것처럼 말이다.(어떤 경우에는 그들의 허영심이 기억을 가리는 바람에, 그들이 선택적인 기억상실에 힘입어 양심에 한 점 부끄럼 없이 문득 떠오른 깨달음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당시에, 어린 나이에도 나는 이런 기생적 형태의 가스라이팅을 잘 알고 있었다. - 404

- 시작은 1922년이었다. 그때 A는 교향악단에 기부하라며 주었던 소액으로 내가 자기 기금보다 더 나은 수익을 올린 것을 보았다. 내 장부를 살폈다. 나한테 설명하라고 했다. 몇 주 뒤, 자기도 내 접근법을 시도해보았지만 실망스러운 결과를 얻었다고 했다. 자기 작업을 보여주었다. 살펴보니 그저 내가 했던 일을 훨씬 더 큰 규모로 복제했을 뿐이었다. 시장 충격을 고려하긴 했지만, 그 모든 일을 생기 없고 인공적인 대칭적 감각에 따라 했다. 아무 박자감 없이 맞는 음정만을 누른 격. 자동 피아노처럼. 나는 A의 규모에 어울리는 새로운 스케치를 해주었다. 그 방법이 통했다. - 445

- 나는 점점 더 그림자 속으로 밀려나고 + 오직 그를 통해서만 말하는 게 싫었다. - 446

- 나는 나 자신의 지시에 따랐다.
그 시절 우리의 수익은 베벨 가문이 원래 가지고 있던 재산을 압도했다.
나는 끈적임 원칙 + 거미줄 구조를 A와 무수히 여러 번 의논했다. 그는 내 설명을 따라오는 척하거나 인내심을 잃었다. 내 잘못이다. 수학을 설명하는 데는 늘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이로써 A의적개심이 더 강해졌다.
우리는 많은 돈을 벌어들일수록 사이가 멀어졌고 + 앙심을 품었다.
그는 남성성을 잃은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의 허영심을 역겹다고 느꼈다.
하지만 우리의 기이한 협력은 이어졌다. 나는 과정에 집착했고 그는 결과에 중독됐다. 하지만 그것이 오직 지적인 활동일 뿐이었다고 주장하는 건 정직하지 못한 일이다. 나는 그 안에서 깊은 야망의 우물을 발견했다. 그로부터 어두운 연료를 시추했다. - 452

2023. jun.

#트러스트 #에르난디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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