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금니 깨물기 - 사랑을 온전히 보게 하는 방식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를 악물고 시간을 버텨내는 동안 써내려간 글들.

얼마전 김혜순 시인의 새 시집이 엄마에 대한 기억들이었고, 이번 김소연 시인의 산문도 가족에 대한 글이라서 나또한 그런 가족에 대한 기억들이 들춰지고 마음이 좀 어수선해졌다가 또 글로 위로를 받기도 한다.

열렬하고 아픈 것이, 시끄럽고 무서운 것이 시라는 시인의 말에 격하게 공감한다.
여백이 많은 띄엄띄엄 한 그 글들이 그렇게 느껴지는 날이 많다.

- 병원에 엄마를 모시고 가던 어느 날이었다. 차 안에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엄마가 말을 끊고 조용히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핸드폰의 녹음 버튼을 누르고 엄마의 이야기를 녹음하고 있었다. 저절로 엄마의 노래가 녹음이 되었다. 녹음 중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때만큼은 따라 부르는 것을 하지 않았다. 그저 듣기만 했다. ˝동그랗게 동그랗게˝를 부를 때부터 엄마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울먹이면서 끝까지 불렀다. 저절로 엄마의 울먹임까지 녹음이 되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엄마의 흔적들이 불현듯 발견되는 것이 버거웠던 어느 날, 이 녹음 파일이 있다는 걸 기억해내어 찾아서 들었다. 비가 왔던 날이어서 와이퍼 소리에다 깜빡이 소리까지 배경음으로 흘러나왔다. ˝동그랗게˝라는 노랫말이 나오기 직전에 나는 스톱 버튼을 눌렀다. 아주 나중에 다시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8

- 여기 모인 글들은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꼈던 시간 속에서 썼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하여 한 자리에 오래 웅크려 있었다. 자주 지쳤고 쉽게 엉망이 되었다. 그래도 내가 지키고 싶었던 것들을 열렬히 지키고 싶어 했다. 균형을 찾기 위해 자주 어금니를 깨물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간은 이를 악물고 가장 열심히 산 시간이라는 것을, 여기 모인 글들을 쓰는 동안 알게 되었다. - 8

- 단어가 아니라 문장이, 문장이 아니라 맥락이, 맥락이 아니라 노래 비슷한 것이, 노래가 아니라 울먹임이, 울먹임이 아니라 불꽃이, 불꽃이 아니라 잿더미가 비로소 백지 위에 하얗게 쌓인다. 시는 온갖 실의와 실패를 겪어가며 끝장을 본, 한 줌 재인 셈이다. - 74

- 시는 그러므로 차분한 것 같지만 실은 시끄럽고 무섭다. 입을 봉인한 채 몸으로 지르는 비명이라서 침묵이나 적요에 가깝다 느껴질 뿐, 시는 열렬하고 아프다. - 76

- 어떤 끔찍함을 행한 인간에게 ‘괴물‘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괴이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렇게까지 극악무도한 경우는 인간이 아니라고 아예 선을 긋고 괴물이라 별도로 칭하면서까지, 인간됨의 범주를 과보호하려는 욕망 같기만 하다. 인간의 본성을 선량함으로만 축소하려는 정치적 산물로 느껴진다. 인간 본성에 그만큼 무시무시한 면도 있다는 것은 영원히 모르게 하려는 심산 같기만 하다. 공포스러워서, 있는 것을 없다고 일축하는 행위. - 85

- 가까운 미래에 내가 시인으로 살아야겠다고 작정을 했다면, 아마도 그때의 나는 그 어떤 시집에서도 내가 읽고 싶은 문장을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읽고 싶은 문장이 무엇인지를 내가 뚜렷하게 알고 있을리는 없지만, 읽고 싶은 문장을 찾지 못했다는 것은 뚜렷하게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문장을 나는 반드시 쓰게 될 것이다. 쓰고 나서 자신이 기다렸던 문장이라는 것을 알아챌 리는 없을 것이다. 내가 쓰게 될 문장보다 내 자신이 조금 먼저 어딘가로 앞서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다렸던 문장은 언제고 한 걸음 늦게 내게서 구현될 것이고, 그것을 구현 하는 나는 언제고 다른 것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가는, 시차와 낙차를 경험하는 자가 될 것이다. 나는 시차와 낙차를 발견하는 자이고 그것을 자주 경험하는 자일 것이다. - 170

2022. jun.

#어금니깨물기 #김소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