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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기둥 3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5
켄 폴릿 지음, 한기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평점 :
아직도 잭이 만든 아름다운 성당 내부에 울려퍼지는 수사들의 성가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아치위에 늘어선 긴 창문들이 햇살을 가득 들이고, 높은 천장 아래에선 미사보를 쓴 여인들이 묵주를 손에 감고 기도를 읊조린다. 한동안 그 시절에 몸담고 살았던 만큼 소설 속에서 함께 울고 웃었던 그들의 세상에서 쉽게 헤어나오기가 어렵다.
처음 이 소설 <대지의 기둥>을 만난 것은 그 소개가 너무도 강렬하게 나를 끌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성당을 짓고 싶은 한 남자의 이야기라니 오래 된 거대 건물들을 볼 때마다 그 옛날에 어떻게 저런 건물을 지을 수 있었을까 항상 궁금해 하던 터라 더욱 그랬다. 그러나 내 손에 들어온 그 책들은 어마어마한 두께를 자랑하고 있었고 심지어 권수도 세 권이나 되었다. 평소 나는 두꺼운 책을 선호하는 편이다. 한번 책 속에 빠져들면 그 세계에서 나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책은 정말 내게 맞춤한 책이었다. 그러나 가뜩이나 바쁜 시기여서 쉽사리 손에 들지 못하고 미루고 있었다. 분명 이 책은 한번 손에 들면 쉽게 내려놓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몰입해서 그 안에서 살고 싶은 작은 소망으로 미루고 미루던 이 책을 처음 열던 날의 감격을 기억한다. 띠지를 열고 책의 앞뒷날개를 읽으면서 작가에 대한 흥미가 새록새록 피어났고, 그의 다른 책들이 어서 우리에게 소개될 날들을 기다렸다.
소설은 그 길이만큼이나 다양한 인물과 사건들로 엮어져 있다. 프롤로그는 교수형 장면이다. 붉은 머리의 흰 피부를 한 외국어를 쓰는 남자는 자신이 왜 죽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처형을 당한다. 그 때 한 명의 기사와 한 명의 수사와 한 명의 수도원장이 그 증인이 된다. 한 소녀가 나타나 그들을 저주하고 그 저주는 그들 평생을 따라다닌다.
석수인 톰이 있다. 대성당을 자신의 손으로 짓는 것이 꿈인 그는 그의 재능을 인정하고 약속한 손쉽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마다하고 성당을 짓는 일터를 찾아 떠돈다. 그의 억세고 튼튼한 아내 애그니스는 늘 그것이 불만이다. 아들 앨프레드와 어린 딸 마사, 그리고 몸 안의 새 생명을 먹이려면 한 곳에 정착해야하지만, 또한 그녀는 남편의 소망을 이해하기에 거기에 따른다. 그러나 톰의 소망은 결국 톰에게 평생에 남을 상처를 주고 만다.
수도원장인 필립이 있다. 웨일스 출신인 그는 여섯 살 무렵 폭도들의 손에 부모가 죽는 모습을 보았다. 필립과 그의 동생 프랜시스 역시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할 처지에 빠지지만, 수도원장인 피터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고 그들은 수도원에서 자란다. 당연한 수순처럼 그들은 수사가 되고 청렴하고 독실한 필립은 무너져버린 킹스브리지 수도원의 수도원장이 되어 수도원 재건에 힘을 쓴다. 그는 부주교 웨일런과 공조를 이루지만, 평생을 두고 이어질 웨일런과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햄리 일가의 잘 생긴 아들 윌리엄은 셔링의 백작의 딸에게 차이고 심사가 뒤틀린다. 아름답기 그지 없는 엘리노어는 거만하기 짝이 없어서 윌리엄을 바로 눈 앞에서 모욕하고 조롱했던 것이다. 그는 엘레노어의 코를 납작하게 할 방도를 궁리해내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아비없는 아들 잭을 키우는 엘렌은 숲에서 살아가는 범법자이다. 그녀는 숲의 생리를 잘 알고 글씨를 알고 많은 이야기들을 안다. 부유한 가문 출신인 그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자신을 수녀원에 집어 넣은 뒤로 혼자서 살아가는 법을 깨우쳤고, 아들을 낳자 그 아비를 감추려 숲에서 산다. 그녀는 교구의 사제와 수도원장과 기사에게 저주를 내렸기 때문에 마녀로 불린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그녀는 실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
이 책 속의 세상에서 이들의 운명은 서로 얽히고 얽혀서 죽음으로만 그 인연의 끈을 끊을 수 있었다. 이어지는 사건과 사고들은 그들의 운명을 이었다가 떼어놓았으며 그들은 거센 운명의 파도에 휩쓸려서 때로는 신을 원망하고 때로는 서로에 대한 사랑의 힘으로 견디며 그 풍진 세상을 살아나가고 죽음을 맞이한다.
주인공들의 험난한 운명과 삶에 대처하는 그들의 태도는 책을 읽는 내내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을 정도로 흥미로웠다. 읽는 내내 엘레노어의 파란만장한 운명에 함께 상심하고, 톰의 원대한 이상에 공감할 수 있었다. 게다가 섬세하고 꼼꼼한 시대에 대한 고증이 책을 읽는 흥미를 더한다. 이 책을 보면서 나는 당시 사람들이 먹는 음식과 그들이 입었던 옷을 상상하고, 그들이 걸었던 거리와 공사장의 망치 소리를 떠올릴 수 있었다. 마침내 잭이 영국에서는 보기 드믄 아름답고 날렵한 성당을 지었을 때 그 성당에 나는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