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시작은 끝없는 허기에 대한 고백이다. 고백의 주체는 누구인지 드러나지 않지만, 그는 흰빵과 응고된 젤라틴이 술처럼 늘어지는 미국산 분홍 스팸과 카네이션 분말 우유에 대한 그리움을 고백한다. 그리고 등장하는 소녀와 나이든 할아버지의 대화는 이 고백과 소녀를 금세 연관시키지 못한 내게 갑작스레 다가왔다. 솔리망씨의 사랑을 듬뿍 받은 에텔, 그리고 에텔이 사랑한 아름다운 소녀 제니아와의 추억이 파리를 배경으로 끝없이 펼쳐진다. 연보라색의 아름다운 집을 지어 거울 연못을 만들고 새들을 불러들이게 하겠다던 솔리망씨는 느닷없는 죽음으로 연보라색 집을 덮개로 씌우게 만들었다. 에텔의 허황한 아버지 알렉상드르는 모든 유산의 권리를 에텔로 하여금 자신에게 양도하게 했고, 그것은 에텔에게 먼 훗날의 허기를 예고한다. 알렉상드르의 살롱에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어지러운 유럽의 정세를 탓하고, 에텔은 창가의 자리에 앉아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점점 어른들의 세계와 아버지의 가식에 환멸을 느낀다. 밤마다 큰 소리를 내면서 다투는 부모, 에텔의 마음을 애태우는 친구 제니아, 살롱에 드나드는 점잖은 영국 청년 로랑과의 얽히고 설키는 관계 속에서 에텔은 성장한다. 어느 날 모든 재산을 다 잃고 병마저 든 아버지와 피난을 떠나는 에텔은 이젠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클레지오의 소설을 처음 접하는 것이라서 무엇이라 단정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그의 이 소설이 그의 어머니를 모델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뒷부분의 '옮긴이의 말(기억의 변주)'을 읽으면서 확인이 되었다. 어딘지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문체와 사건의 진행이 조금 혼란스럽고 명확히 다가오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옮긴이의 말을 읽으면서 알게 된 새로운 소설 '아프리카인'에 대한 관심이 생긴다. '르 클레지오 문학의 원형질을 맛볼 수 있는 내밀한 고백이자 아버지에게 바치는 오마주'라는 글귀가 마음에 쏙 든다. 어머니를 읽었으니 아버지를 읽어야 '그'를 알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