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nf 모든 것은 한 통의 전화로부터 시작되었다. 자수성가한 사업가 황복만 사장에게는 꿀맛같은 오후의 휴식 시간이 있다. 회전의자를 뒤로 눕혀 놓고 온갖 좋은 것을 담은 쌍화차를 한 잔 마시면서 12층 아래의 세상을 굽어보는 그 휴식시간은 황사장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황사장의 전 생애를 뒤흔들 한 통의 전화는 마치 일부러 그런 듯이 마침 그 시간에 걸려왔다. 사업은 승승장구하고, 자식들은 다 성공하고 뭐 하나 부러울 것 없던 황사장은 자신을 '배점수'라 부르는 그 전화에 세상을 다 놓쳐버린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이라는 게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죽을 고생을 하면서 자식들 다 키워놓고 이제 좀 쉬련다 할 때 꼭 뇌졸중이 오고, 암이 드러난다. 혹은 교통사고가 나거나 심장이 멈추기도 한다. 힘들고 바쁠 때는 아프지도 않더니 어려운 일 다 끝내고 여유를 가질만하면 역경이 닥쳐오는 것은 우리의 삶에 정해진 이치인지도 모르겠다. 네 쓸모는 거기까지이니 이제 그만 태초의 그 곳으로 돌아오라는 뜻인 걸까? 혹시 그렇다면 지금의 이 아둥바둥한 삶을 꼭 쥐고 있어야할 지도 모를 일이다. 황사장 스스로도 잊고 있었던 자신의 본명, 그리고 그 이름의 뒤를 따라오는 끔찍한 기억들은 황사장을 혼란 속에 빠뜨린다. 그 기억 속에는 피비린내나는 삼봉산이 있고 맞아죽은 첫 아내가 있으며 팔푼이가 된 칠성이가 있었다. 오로지 전화를 건 사람에게 매달리면서 자신을 살려달라고 비는 늙은 그에게 마지막까지 지켜야할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소설의 제1쇄가 찍힌 날짜는 1983년이다. 붉은색에 대한 과민반응이 삶의 모든 것을 구속하던 시절, 29년전의 그 상처는 황사장의 아들에게까지도 손을 뻗친다. 대학에서 강단에 서고 있는 젊은 황형민 교수는 어느 날 밤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그날부터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전화 속의 그가 말하는 모든 것들은 황형민의 존재 기반을 흔드는 것들이었다. 어린시절부터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었던 아버지, 독립운동가와 반공투사의 후손으로서 빈 손으로 남으로 내려와서 지금의 사업을 일구고 자식들을 훌륭히 키워내신 아버지가 그가 아는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에 혼란스럽다. 게다가 그가 말하는 내용에 따르면 아버지는 부역을 했던 빨갱이가 아닌가. 조상의 부역 행위에 고통받는 친구들을 둔 그로서는 받아들이기가 힘든 일이었다. 신범호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배점수의 죽음이었을까? 황형민 교수는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의 마음 속에 아버지는 이제 어떤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 그 어느 것도 해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아마도 그 해답을 찾는 것은 독자의 몫일 것이다. 우리 문단의 큰 거목인 작가의 30여년 전 작품을 이제야 접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대학원 시절 한 학기 대하소설을 연구할 때 내가 선택한 소설은 <태백산맥>이었다. 그만큼 관심과 사랑이 깊다고 생각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은 소설 중의 하나로 <태백산맥>을 꼽고, 권영민 교수의 <태백산맥 다시 읽기>까지 읽으면서 그의 소설 세계에 가까이 가고 싶었음에도 이 소설 <불놀이>의 존재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다른 소설보다 약간 호흡이 빠르다고 느껴지는 것은 작가의 대하소설들에 익숙한 때문일까? 다행인 것은 읽지 못한 작가의 소설들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