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소설들은 대부분 사랑이 끝난 다음에 시작되는 걸까? 두근두근 설레는 사랑의 시작부터 들려주면 너무 '사랑의 체험 수기' 같을까봐 그러는 걸까? 아니면 닭살 돋아서? 아니면 혹시 이 세상에 사랑은 없어서 할 말이 없는 걸까? 거의 대부분의 소설들은 끝나 버린 사랑에 당황하고 있는 이를 주인공으로 한다. 그들은 느닷없이 떠난 그 혹은 그녀에 대한 표현하지 못할 미련과 아쉬움, 미움과 원망, 그리고 깊은 사랑을 마음 속에 감춘 채 짐짓 담담한 체하면서 일상을 영위한다. 그러나, 그 혹은 그녀는 어느 날 우연히 커피 한 잔에, 혹은 노래 한 구절에 폭풍같은 울음을 떠뜨리기고 만다. 그 곁에는 또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또 다른 그 혹은 그녀가 있게 마련이고, 처음엔 자신의 그런 모습을 들켜버린 게 분해서 그 상대를 미워하던 우리의 주인공은 연속적인 그 혹은 그녀와의 만남과 그 혹은 그녀의 지속적인 관심에 마음이 배시시 풀리고 만다. 이 소설 <사라다 햄버튼의 겨울> 역시 한 남자가 혼자 남으면서 시작된다. 오랫동안 한 공간안에서 사랑하던 여자가 어느 날 느닷없이 떠난다. 나는 어쩐지 그동안 잘 다니던 직장에도 가기 싫고 모든 것이 귀찮다. 어쨌든 난 숨쉬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본문 9쪽)고 그렇게 가라앉아 있던 어느 날 고양이가 나의 삶 속으로 걸어들어왔다. 먹던 샐러드를 잘도 받아먹는 고양이에게 축구를 보면서 사라다 햄버튼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그리고 떠난 S대신 사라다와 한 집에 살게 된다. 이쯤되면 이제 제3자가 나타날 때가 되었다. 그럼 그렇지 나의 삶에 가끔 들르던 술집의 바텐더 R이 나타난다. 어리고 상큼한 그녀에게 고양이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은 가끔 함께 술을 마신다. 그런데 이 둘의 관계가 좀처럼 진전되지 않는다. 대신 나의 아버지가 미국에서 동생 탄생의 소식을 갖고 들어오면서 나는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억하고 아버지 덕에 어쩌면 또 진짜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사람과도 만나게 된다. 사라다와 함께 하는 나의 시간들은 군데군데 비어있던 나의 삶을 완전한 조각으로 맞추는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날 나타난 고양이 탐정은 사라다가 이 동네 고양이라고 말한다. 누구나에게 찾아오는 깊은 혼란의 시기가 있다면 주인공 '나'에겐 사라다와 함께 지낸 그 시간이 아마도 그 시기였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통과해 왔다는 그 시간들을 누구는 이렇듯 뼛속까지 강렬하게, 또 누구는 나처럼 슬그머니 지내버리게 된다. 이 혼돈의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또 다시 새로운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윙크를 날릴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렇게 깊이 앓아낸 혼란이 바로 젊음이 아닐까? 깊고 뜨겁게 아파서 깊은 상흔을 내지만,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어깨 위의 불주사 자국처럼 남은 삶의 예방주사가 되어주는 그런 젊음이 부럽다. 물에 물 탄 듯 슬그머니 임팩트 없이 보내버린 나의 젊음이 내가 삶의 고통에 직면했을 때 별 도움이 못 된 것을 보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