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 개정판
이도우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제부터인가 연애 소설을 읽지 않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는 그 유명한 로맨스 시리즈 소설을 읽느라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눈을 속이기도 하고(지금 생각해 보니 선생님께서도 다 아시고 계셨을 것이다. 교탁에 서면 다 보이니까 말이다.) 공부할 때는 못하면서 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다. 그 당시에 우리반 아이들이 한 50여명 되었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 시리즈에 열광했다. 가격도 저렴하고 판형도 작은 그 책을(물론 번역도 조악하고 책의 질도 과히 좋다고는 할 수 없는) 각 한 권씩 사서 돌려보기도 했다. 우리는 수험생이었다. 그래도 나는 우리반에서 돌던 그 책을 거의 다 읽었다. 마치 내가 여주인공이나 된 듯 가슴이 설레고 마음이 아프면서 감정이입을 몸소 경험했고, 아이들과 그 감상을 쪽지로 나누기도 하던 그 시절엔 연애 소설만이 진정한 소설이었다.
 자라서는 주위 분위기가 연애소설을 읽기에는 좀 건조하고 냉랭했다. 다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지 궁금해하고, 타는 목마름으로 무언가를 추구하던 시절이었다. 연애도 결속을 다지는 행위라고 생각하던 분위기였다. 연애 소설은 밤에 집에서나 읽었다. 그리고 나이가 더 든 지금은 어느샌가 연애 소설을 표방한 책들이 너무 달달하고 낯간지럽다는 생각을 하고 그리고 그건 그저 애들이나 하는 소리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아마도 사랑을 믿지 않게된 것이겠지?

 그래서 이 책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의 소문은 익히 듣고 있었고 장바구니에 넣어둔 지 오래되었는데도 다른 책들에게 우선 순위를 늘 넘겨주어 실제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것도 한참 후의 일이다. 집의 책장에 꽂아두고도 다른 책들을 읽느라 늘 뒷전이던 이 책을 집어든 것은 그저 우연이었다. 그러나 일요일 아침부터 읽기 시작한 이 책을 쉽사리 내려놓기는 힘들었다. 저녁 무렵 이미 이 책은 뒷장을 넘겼다. 이 책이 그저 달콤하기만한 젊은 아이들의 사랑 놀음을 다룬 것이라면 아마도 읽다가 던져두고 딴 책을 찾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들은 이미 사랑의 달달함을 낯간지러워할 나이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한 사람을 아무리 사랑해도, 때로는 그 사랑을 위해 죽을 수 있어도... 그래도 어느 순간은 내리는 눈이나 바람이나, 담 밑에 핀 꽃이나.. 그런게 더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거, 그게 사랑보다 더 천국일 때가 있다는 거, 나 느끼거든요?"(405쪽) 이 깨달음은 진정 인생의 쓴 맛을 아는 어른들만이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나 역시도 목숨을 건 사랑보다 큰 나무가 있는 언덕에 앉아서 바람을 쐬고 햇빛을 쪼이는 것이 더 행복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연애 소설이라면 흔히 만드는 장치인 커피니 가을이니 쓸쓸함을 조성하는 설정도 여기엔 없다. 오히려 이들은 트로트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들이고 그들의 노래는 "밤 깊은 마포종점"이거나 "진주 난봉가"이다. 그들은 실제 내 주변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남자와 여자로 직장일의 스트레스와 인간 관계의 어려움에 지치고 피곤하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남자와 여자가 나눌 수 있는 대화여서 더욱 절절했다.

 오랜만에 만난 연애소설은 추운 계절에 마음 따스하게 한다. 그들의 평범한 생활이 오래오래 행복하기를...... 이 소설의 속편이 나오지 않기를...... 또 다른 갈등이 진솔과 건을 흔들지 않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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