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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오늘처럼 흐린 휴일 아침이면 으레 커피가 나를 깨운다.
창 밖으로 쏟아질 듯 내리는 비가 커피를 부르고, 맑은 날 눈부신 태양도 커피를 부른다.
한겨울 도서관에서 호호 불며 100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함께 마시던 그 친구들은 지금도 나처럼 커피를 달고 살까?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지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가끔은 속이 안 좋아서 덜 마시기도 했지만 지금도 아침을 시작하려면 커피 한 잔이 필요하다. 다들 편리하고 맛나다고 믹스 커피를 즐기지만 나는 큰 유리병에서 커피를 덜어내어 타서 마신다. 그것도 아주 큰 잔으로 말이다. 동료들은 내 커피잔을 보고 대야라고들 부르며 놀린다. 하루에도 몇 번씩 커피물을 끓인다. 아주 뜨거워야 제 맛이다. 피곤해도, 기분이 좋아도 커피를 마시고 싶다. 내가 하는 가장 큰 호사가 한 여름에 시원한 곳에서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것이라고 하면 다들 정신 나간 여자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때 나는 정말 행복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나의 커피 사랑은 나의 위장을 갉아 먹고 나의 잠을 방해하지만 아직은 이별하고 싶지 않다. 혹시 오늘밤도 쓰린 속을 부여안고 뜬 눈으로 지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오늘은 비가 너무 많이 온 탓이다.
<노서아 가비>의 표지를 보면 커피 생각이 간절해진다. 커피색 바탕에 붉은 스카프를 날리는 여인이 세상을 다 아는 눈빛으로 그래서 슬퍼보이는 얼굴로 커피를 마시고 있다. 스카프는 바람에 날리고 어쩌면 여인의 머리 위로 눈발이 날리는지도 모르겠다. 이 여인의 이름은 따냐라고만 하자. 어린 나이에 역관인 아버지를 둔 덕에 사양의 커피맛을 알아버린 따냐는 구속받는 삶을 거부하면서 국경을 넘는다. 그 큰 나라들을 방랑하면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서로를 속고 속이면서 따냐는 이반을 만나서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이반을 따라서 그렇게도 황망히 떠났던 고국에 돌아온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현실에서도 따냐는 살아남는다. 그리고 마지막 황제의 커피를 만드는 일을 하게 된다. 누구도 더럽히지 않은 순정한 시간에 깨끗한 손으로 내리는 따냐의 커피는 그동안의 그녀의 인생과는 다르게 깊은 진정을 보인다.
책의 사이사이마다 아름다운 일러스트들이 커피를 소개하고, 커피를 만드는 법을 보여준다, 각 장의 제목들은 커피에 관한 명언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커피는 맛보지 않은 욕심이며 가지 않은 여행이다." 알겠는가? 이 밤 내일에의 걱정은 잊고 뜨거운 커피를 마주해야하는 이유를 말이다. "이익을 위해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이 또한 인생이다."(본문 159쪽)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뜨거운 커피를 앞에 놓고 서로를 마주보는 이순간만큼은 그래도 진실함이 있다고 믿고 싶다. 나의 휴일 아침을 깨우는 그의 커피가 진실이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