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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
보리스 비앙 지음, 이재형 옮김 / 뿔(웅진)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의 표지에는 붉은 머리의 백인 여성이 도발적인 눈빛으로 독자를 노려보고 있다.
커다란 눈동자와 섹시한 입술로 짓고 있는 묘한 미소는 이 책의 느낌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이 소설의 부제는 "20세기 누아르 소설의 고전"이다.
프랑스어로 '검다'라는 뜻인 누아르는 영화와 소설의 장르에서 곧잘 사용되는 용어로 누아르 소설이란 "음침하고 무언가 악의 그림자 같은 것이 느껴지는 복잡한 플롯의 탐정소설 "을 가리킨다고 한다. 흔히들 '홍콩 누아르'라고 하는 영화들이 대부분 조직 폭력배의 알력과 다툼을 그리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누아르란 어떤 것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은 누아르 소설의 초기작이어서인지 탐정 소설의 분위기와 복잡한 플롯은 느끼기 어려웠고, 오히려 줄거리는 아주 간결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처음 소설을 읽기 전에는 광고와 표지의 그림만 보고 주인공이 여자인 줄 알았다.
주인공 리 앤더슨은 어느날 가상 도시인 벅튼에 나타난다. 그는 클렘이라는 형의 친구에게 이 일자리를 얻었다. 리는 고향을 떠날 수 밖에 없는 사연이 있다. 그 사연은 소설의 전편에서 서서히 밝혀지는데, 리의 모든 행동의 원인이 되고 이 소설의 큰 줄기가 된다. 리는 백인들에게 증오심을 갖고 있다. 리는 백인들에게 복수를 하고자 백인 여자들을 농락하기로 한다. 사실은 흑인의 피가 1/8이나 흐르지만 완벽한 백인의 외모를 갖춘데다가 아름다운 몸매와 약간의 경제적 여유, 뛰어난 기타실력으로 벅튼의 망나니 여자들을 정복해 가는 그에게 새로운 도전과제가 나타난다. 아름답고 도도한 부잣집의 두 딸들인 애스퀴스 자매들이었다. 애스퀴스 자매들은 그가 같이 놀다가 버린 주디나 지키와는 달랐다. 리는 이 둘을 농락한 뒤에 죽여서 동생의 원수를 갚을 결심을 한다. 그리하여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 둘에게 접근을 하지만, 그것이 그의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한 동안은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리의 행동을 이해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작품 안에서 리가 보여주는 생각과 행동은 정상이 아니었다.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면서 그가 이루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백인들을 이 땅에서 없애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한 두명의 백인을 죽인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리도 알 것이다.
짧지는 않은 경험의 길이를 갖고 있는 나로서도 리의 행동은 스스로를 버리는 자학적인 행동으로 밖에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결국엔 가장 상처받은 이는 복수를 계획하고 실천에 옮긴 리였던 것이다. 누구든 미운 사람이 생기면 가장 힘든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 마음이 뿜는 독 때문에 스스로가 위험에 빠진다고 한다. 리는 스스로가 만든 구렁텅이에 빠져서 죽어간 셈이다.
가끔 작가의 의도나 글의 목적을 이해하기 어려운 책들을 만나기도 한다. 어린 시절에는 나의 배움이 부족해서 그 내용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좀 더 자라서는 글의 내용이 너무 수준이 높아서 내가 잘 모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는 척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얼마나 우스운 일들인지 모른다. 글이라는 것은 결국 읽는 사람이 이해한만큼 그 사람의 것이 되는 것이다. 한 가지 더 바란다면 누구나 이해하는 말로 쉽게 쓴 글이 가장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