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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 외우는 파랑새
방민지 지음 / 문학수첩 / 2008년 11월
평점 :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글을 쓴다면 앉은뱅이 책상에서 담요를 두르고 앉아서 마구 종이를 구겨대는 작가를 상상하면서 자란 내 세대에게 컴퓨터를 이용하여 글을 쓰는 작가의 모습은 아직은 낯설기만하다. (황석영선생님은 그것 또한 게으름이라고 설파하시더만)
게다가 작가의 나이가 점점 더 어려지고 있기도 하다. (소설을 좋아하는 나는 언제부터인지 작가의 나이를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아마도 작가의 나이가 나와 비슷해지던 그 시점부터였을 것이다. )
요 몇년 전에는 귀여니라는 필명을 쓰는 청소년 작가가 인터넷을 후끈 달구는 소설들을 써서 스타가 된 사례도 있었다시피, 요즘 아이들에게는 글을 써서 발표한다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듯 하다. 세대가 많이 달라지긴 한 것 같다.(내가 보는 중2의 아이들은 글을 쓰는 것을 싫어하던데, 그것도 일부 소수인가?)
예전에야 신춘문예나 무슨 공모전에 당선이나 되어야 내가 쓴 글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에 비하면 이 얼마나 밝은 세상인가 말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이 소설 <주문을 외우는 파랑새>를 쓴 작가 방민지가 중학생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이라면 15살이다. 한창 수행평가와 시험공부로 지치고 학교에서는 여자친구들과 사소한 신경전을 벌이는 시기, 선생님께 살그머니 반항심도 생기고, 부모님의 잔소리가 답답하게 느껴지는 그런 시기인 것이다. 그 바쁜 시기에 이렇듯 긴 소설을 써내는 것을 보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차갑고 이기적인 엄마에게서 상처를 받고 있는 예린은 머리가 아프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부모님이 이혼을 한단다. 엄마가 싫은 예린은 아빠와 살기로 하고, 새엄마와 동생을 맞는다. 그러나, 새로운 가족들과의 생활도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다. 결과적으로 예린은 엄마의 사랑을 너무 늦게서야 깨닫는다.
이 소설은 사춘기 소녀 예린의 방황과 가족간의 소통의 부재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덜 익은 사과와 같은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제는 무엇인가 사춘기 소녀의 이해받지 못할 상처와 방황인가? 아니면 어른들의 이기적인 모습에 희생당하는 아이들인가? 명확하지가 않다. 단지 10대 아이들의 생각을 이해받고 싶은 것이라면 너무 이야기가 장황하다. 구성 또한 어설프기 그지없다. 등장인물들은 전혀 개성이 없으며, 인물 또한 이기적이고 주관적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그들의 행동에 어떤 공감을 갖기가 어렵다. 그리하여 사건전개도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어 억지로 꿰어맞춘듯한 작위성이 드러난다. 서술자의 지난친 설명 위주의 서술은 읽는 이를 힘들게하고 몰입이 어려워진다.
삶과 세상에 대한 통찰과 사색이 글을 쓰는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때문에 글을 쓰는 사람들은 많은 생각을 한다. 또한 세상을 보는 눈이 넓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 때, 진정 세상에 알리고픈 이야기가 있을 때, 말하지 않으면 내가 죽고 말 것 같은 이야기가 있을 때 글을 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새 시대에 대한 비전과 전망에의 제시가 소설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 문학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이유가 그것이 아니겠는가.
아직은 어린 청소년이므로 그런 깊이 있는 통찰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이 작가가 가진 소설에 도전한 용기와 자신감을 높이 산다. 대부분의 중학생들을 글이라는 것을 두려워하고 글을 쓴다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편인데, 이 작가는 글쓰기와 천생의 인연이 있는 듯하다.
좀 더 많은 경험과 독서 그리고 사물과 사람에 대한 관찰과 인생에 대한 애정을 공부한 후에 써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