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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행
시노다 세츠코 지음, 김성은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결혼과 더불어 인생의 가장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구나 인정할 일이다.
남자든 여자든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 그에게 서로 적응하고 서로의 역할을 결정하는 시간들이 있다.
약간의 알력이 작용하고 서로 기싸움도 하지만 대개는 여자들이 더욱 많은 생활의 책임을 맡게 된다.
식사 준비, 집안 청소와 빨래까지 전통적으로 여자의 일로 인식되어 있는 수 많은 집안 일을 처음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리고 소꿉놀이 하듯 사랑의 마음으로 행하게 된다.
남편의 옷을 깔끔하게 만져주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만든 음식을 맛나게 먹어 주면 너무 고맙고 사랑스럽다.
그러다가 아이가 태어나면 너무나 늘어난 일에 당황하고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남자들은 그 때까지 잘해오던 일을 새삼스레 나누자고 하는 아내를 이해하기 싫어한다.
아내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 입아프게 자꾸 얘기하기도 귀찮고, 돈을 벌어오는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까지도 갖는다.
아이가 없을 때야 귀찮으면 밥을 안 해 먹어도 되고, 빨래를 하지 않아도 되지만 아이가 있으면 그것은 꼭 해야할 일이 되고 만다.
그런 세월을 다 지내고 아이들도 엄마의 손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무렵이 되면 자신의 인생이 껍데기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게된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한 상의 밥을 먹고 한 집에서 잠을 자지만 어느 순간 더 이상은 서로를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자기만의 생각 속에서 살기도 한다.
서서히 대화의 벽이 생기고 특정 주제가 화제가 되면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평생을 다투어 왔지만 풀어지지 않는 숙제들이 어디에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이 소설 <도피행>의 주인공 타에코는 그런 외로운 마음을 개 포포에게 의지하면서 살아왔다.
남편을 뒷바라지 하고 두 딸을 깔끔하게 키워냈지만, 그들은 타에코의 생각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다. 가끔은 그들은 아픈 타에코의 부탁을 거절하기도 하고 서운한 마음이 들도록 한다.
그러나 포포는 항상 그녀 곁에서 맹목적인 사랑으로 타에코를 바라본다.
그런 포포가 괴롭히는 옆집 아이를 물고만다. 커다란 골든 레트리버에게 물린 옆집 아이는 죽고 말았고, 동네 사람들과 가족들은 포포를 안락사 시키라고 한다.
자식보다 더 마음이 가는 포포를 죽게할 수 없다는 생각에 타에코는 한밤중에 무작정 포포를 데리고 가출한다.
긴 시간 동안 집안 살림만 돌본 타에코는 그 밤에 커다란 개를 데리고 갈 곳이 없다.
게다가 얼마전 수술을 한 터라 몸도 너무너무 힘들다. 그저 포포의 따뜻한 몸을 안고 잠들고 싶을 뿐이다.
후미진 산 고개를 넘고, 멀리로 떠나는 타에코와 포포의 밤길이 순탄하지 않다.
강아지를 기르는 입장으로 타에코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가끔은 강아지의 눈을 들여다 보거나, 강아지가 나를 바라보는 눈길을 느낄 때면 그 작은 머리 속에 어떤 생각이 들어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내 마음 속의 생각들도 다 눈치채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창 밖을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은 어딘지 사색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강아지의 나이로는 결코 어리지 않은 우리 앨리스는 자신의 견생을 돌아보는 것일까?
타에코가 지키고자한 것은 단지 개 포포의 목숨이 아닐 것이다.
타에코 자신의 존엄성, 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할 권리를 지키고자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타에코가 다른 사람의 의견과 관계없이 스스로 선택한 곳에서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살아가는 모습은 당당해 보였다.
더 이상 서로를 이해하지 않기로 했을 때, 그것은 혈연이라는 이름으로도 묶을 수 없는 더 낯선 타인이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