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기억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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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를 우리는 이야기한다.
쓰라린 실연도, 가슴 아픈 사별도 다 시간이 약이라는 주문으로 위로를 대신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지금의 삶에 충실하고 열심히 생활하다보면 그 아픔들을 다 잊을 것이라는 말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하기도 하고 듣기도 했던가!

 

그러나, 때로는 그 기억이라는 것이 제멋대로이기도 해서 잊고 싶은 기억만을 골라서 정신의 저 깊숙한 곳에 모셔두기도 하고  까맣게 잊은 줄 알았던 추억도 삽시간에 그 거리에서 풀어 놓기도하여 기억의 주인을 당황하게 한다.
인간이 기억을 장악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또한 사람마다 그 기억의 촉수를 건드리는 도구도 제각각이어서 언제 어느 것이 상대의 저 깊은 기억을 건드릴 지 모르고 또 언제 나의 심약한 부분을 두드려 파문을 만들어 낼 지 모르는 일이다.

 

이 책 <도시의 기억>은 흔한 여행기가 아니다.
이 책에서 파리의 숙소에 대한 정보를 찾고자 한다거나. 로마의 싸고 맛있는 피자집을 알고자 한다면 책을 잘못 고른 것이다.
이 책은 저자의 기억속의 도시들의 환생이다.
나이에 비해서 그리 해외 여행 경험이 많질 않다고 말하는 저자의 말마따나 책에 등장하는 도시들은 그 분량에 비해서 많지는 않다.
그러나, 오사카에서 시작된 그의 도시의 기억들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끝나는 동안 나는 그와 함께 마흔 한 군데의 도시를 방랑하였다.
그는 내가 원하는 그 곳에 정확히 나를 데려다 주었다. 지중해를 끼고 말라게냐를 들어야하는 말라가는 언젠가는 꼭 한번 가고픈 곳이었음을 고백한다.
예쁘다는 말로 밖엔 표현할 수 없다는 아랑후에즈를 읽으며 나는 남편에게 <아랑훼즈 협주곡>을 부탁했다. 비록 매끄럽진 않지만 나를 위해서 <아랑훼즈 협주곡>을 연주하는 남편의 곁에서 커피를 마시며 읽는 이 기분은 참으로 독특했다. 아마도 나에겐 오래되는 기억이 될 듯하다.
그라나다에서는 그 섬세한 <알함브라하 궁전의 추억>을 떠올리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특별히 스페인에 많은 부분을 배려한 것이 참 고맙고 기뻤다.
브뤼헤에선 사랑의 호수의 사진이 내눈을 끌었다.
무딘 눈으로 보아서 그 호수는 쇠라의 그림 <라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의 그 호숫가로 보였다.

어찌나 그 구도와 느낌이 비슷한지......그러나, 그 섬은 파리의 센강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책을 읽는 내내 세계지도 앞을 떠나는 것이 힘들었다.
언급되는 수 많은 도시들 중 그 위치를 정확히 아는 것도 내겐 힘겨운 일이었다.
때로는 그게 어느 나라 도시인지 자세히 찾아 봐야할 정도인 경우도 있었다.
저자는 무식한 나를 데리고 힘겨운 여행을 한 셈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박학함에 놀랐다.
소쉬르, 루소, 마르크스, 카프카, 발바크, 모디아노, 렘브란트와 피카소 등 그의 책에 언급되는 수 많은 학자, 화가, 음악가와 철학자들은 나의 현학적 욕구를 건드린다.

 

"나는 아직 내가 그리도 벗어나고 싶어했던 민족주의의 포로다 ."
                                           ------------본문 331쪽

저자의 이 말을 그의 결론으로 삼고 싶지 않은 것은 나의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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