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페의 필름통
곽효정 글.그림 / 섬앤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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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또래들은 극장이라는 델 드나들기 시작한 것이 고등학교 때부터이다.

지금 내 아이가 유치원 다닐 때부터 극장 출입을 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어린 시절 내가 주로 시청하던프로그램은 주말의 명화나 명화 극장이었다.

극장엘 자주 드나들지 못하던 내게 그 프로그램에서 만나는 세상은 경이로움과 환상과 흥분의 세계였다.

그 창을 통해서 나는 폰트랍 가족과 알프스를 넘고 신분을 감춘 아름다운 공주와 로마를 여행하고 티파니에서 아침을 먹었다.

그 시절 게리쿠퍼와 그레고리 펙과 록 허드슨을 구분 못해서 늘 함께 영화를 보던 엄마에게 물어보았던 기억도 난다.

우리 엄마는 외국 영화를 광적으로 좋아하던 클리프 리처드 세대이다.

아직도 "Young Love"를 들으면 꿈꾸는 눈동자를 하는 우리 엄마를 내가 많이 닮았나 보다.

 

쓸데없는 기억력이 좋아서 또 워낙 좋아하는 분야라서  한 번 보았던 영화는 잘 기억을 하는 편이다. 때로는 그 영화와 영화 음악을 통해서 어떤 특정 시절을 기억하기도 한다.

어떤 친구는 입고 있던 옷으로 당시를 기억한다고 하니, 그건 단지 나만의 특성은 아닐 것이다.

 

중학교 졸업식날 극장에서 보았던 영화는 더스틴 호프만의 여장으로 유면한 <투씨>였다.

아직도 그가 어설픈 화장을 하고 바지를 내린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친구에게 변명을 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고교 시절엔 영화를 보러 참 많이 다녔다. 한 때는 홍콩영화에 빠져서 모조리 보리라 결심하고 헤매다닌던 기억이 난다.

우습게도 다들 너무 바쁘던 고3 때 가장 많은 영화를 보았다.

야자를 몰래 빠지고 보았던 <백야>, 가슴두근거리며 보았던 <브레드레스>

등은 함께 보았던 친구와 그 극장의 냄새도 생생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페페의 필름통>은 마치 나의 이야기이다.

영화가 좋아서 남들이 잘 보지 않는 영화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일은 행복이라 여기는 페페.

내가 하고 싶은 많은 이야기들이 이 책 가득 빼곡이 적혀있는 것을 보면서 참 감동스럽고 한편 샘이 났다.

'어머, 이건 내가 쓰고 싶은 얘긴데, 한 발 늦었네?'

 

그녀가 내게 권하는 수 많은 영화들을 다이어리 가득 적어놓았다.

또 이미 내가 만난 수많은 영화들을 그녀는 어찌 생각하는지 내게 속삭인다.

가장 최고의 하나로 꼽는 <노킹 온 해븐스 도어>, <중앙역>, <길로틴 트래지디>와 <나 없는 내 인생>을 이 책에서 만나고 너무 반가워서 눈물이 왈칵 난다.

그녀는 내가 젤 좋아하는 <벤디트>는 어떻게 생각할까?

꼭 물어보고 싶다.

 

세상에는 단 하나의 아름다운 기억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 기억은 때로 그에게 너무나 큰 고통이지만, 때로는 고통도 살아가는 힘이 된다.  일생을 바쳐 돌아가고 싶은 한 때 그 때가 바로 그 기억일테지......

나는 가끔씩 내가 좋아하는 영화에서 그 시절을 만난다.

장만옥의 아름답고 쓸쓸한 웃음에서 잭 니콜슨의 허허로운 조소에서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의 손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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