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선생님과 함께 읽는 현대시
김권섭 지음 / 산소리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어린 시절 우리집에는 부모님의 것으로 짐작되는 작고 낡은 시집이 한권 있었다.

세로줄 쓰기의 그 시집은 가끔씩 나의 심심풀이가 되어 주곤 했다.

군데군데 한문이 섞인 낯선 언어들 틈에서 나는 그 때 처음 하이네를 만났고 릴케를 알았다.

그 시들 중에서 어린 나의 마음에 와 닿았던 시는 황동규님의 <즐거운 편지>였다.

 

즐거운 편지

                        

                          -황동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어찌나 아름답고 가슴이 시리던지 그 시인은 너무나 가엾은 사람일 듯했다.

특히 내가 가장 좋아하던 부분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 였다.

그의 사랑이 너무나 깊고 진실해서 가슴이 아팠다.

너무나 사랑해서 그 사랑은 해와 바람처럼 당연한 것이다. 너무 당연해서 사소하다. 우리는 해와 바람을 그리 대단찮게 여기니 말이다.

그 시를 공책에 베끼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읽어 준 기억도 있다.

아마 그 때가 가장 시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끼던 때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세월은 흘러 갔고 또 다른 읽을거리들에 빠져서 그리고 교과서에 나오는 한용운이니 서정주니 하는 시인들의 시를 공부하느라 <즐거운 편지>는 내게 아련한 기억이 되었다.

 

그리고 그 시가 다시 나의 삶의 표면에 떠오른 것은 영화 <편지>에서였다.

눈물을 쥐어짜는 그 영화, 아름다운 수목원을 배경으로한 - 그 수목원은 가평의 아침**수목원이라고 한다. 지금은 너무 유명해져서 안 간다.- 그 슬픈 영화에서 이 시가 소개되면서 우리나라 사람이 좋아하는 시가 되었다.

그 때 나는 깨달았다. 내게 시를 보는 안목이 있음을......

초등학생 그 어린나이에 나는 20년 이상이 지난 후의 미래에 유행할 시를 미리 알아본 게 아닌가?

그리고 지금 이 시는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서 시험에 출제되기도 한다.

얼마나 선견지명이 있었던 걸까? 나이를 먹으면서 그 능력이 사라진 것이 틀림없다.

 

지금 나는 시와 상당히 가까운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나,  내게 시는 늘 어렵고 거리감이 있었다.

시의 숨겨진 의미를 찾고, 심상을 분석하고 시인의 일생과 연관지어 어렵고 복잡하게 해석을 하면서 문득 "혹시 시인은 별 생각없이 솔직히 한 말들을 우리가 확대해석 하는 것 아냐?"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이 책에는 58명의 현대 시인들의 작품 142편이 소개된다.

가히 중고교 교과서에 등장하는 시인들의 대표작품은 거의 다 수록되어 있다고 보아야한다.

왼쪽 페이지엔 시가 그리고 그 오른쪽 페이지엔 그 시에 대한 설명이 알기쉽게 풀이되어 있다.

마지막으론 다른 문헌에 소개된 시인의 행적이나, 에피소드를 실어서 시인을 더욱 친근하게 느끼게 한다.

책의 서문에서 작가는 이 책에 담은 세 가지 생각을 적어두고 있다. 시의 해설이 시의 분량을 넘지 않도록 하기,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 사용하기, 시인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사실을 일러주기. 이 책은 이러한 목표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꼭 알아야할 우리나라 대표 시인들의 대표작들을 쉬운 말로 설명해주고 시인의 생애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소개하여 시가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한 것 뿐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앞으로도 가까이에두고 수시로 꺼내 볼 수 있도록 하고 싶다.

그리고 시를 어려워하는 학생들에게 한 번 읽어보게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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