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과연 정여립은 역적인가, 혁명가인가. 역적이든 혁명가이든 주류에 반하는 비주류임에는 틀림없다. 성공하면 혁명이요, 실패하면 역적이니 말이다. 난세에 나온 선각자는 세상을 바꿀 수 있지만, 태평성대에 나온 선각자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수 밖에 없음을 신채호 선생은 정여립과 최치원을 예로 들면서 " 사회가 이미 정해진 국면에서는 개인이 영향을 발휘하기가 매우 곤란하다. 사회가 아직 정해지지아니한 국면에서는 개인이 영향력을 발휘하기가 매우 쉽다 " 본문 335쪽 라고 말했다. 삼강오륜과 옛 성현을 사모하는 주자학이 이미 기틀을 다지고 사회가 자리잡은지 오래인 선조 때, 정여립 같은 이가 나타나 "백성에게 해가 되는 임금은 죽이는 것도 가하고, 행의가 모자라는 지아비는 버리는 것도 가하다 "라고 주장하였으니, 그의 말 하나하나는 바로 선조를 비롯한 조선 왕조 전체 체제에 대한 적극적 도전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대다수의 역적 모의와 다른 것은 정여립은 개인의 영달을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정여립이 추구하는 세상은 대동이다. 노비와 양반이 따로 없고 남자와 아녀자가 따로 없는 곳. 천한 중과 벼슬을 지낸 양반이 함께 밥을 지어먹고 글을 지어 겨루는 세상. 조선의 그 많은 천재 선비들과 새로운 왕을 옹립했던 그 많은 혁명 세력 - 혹은 모반 세력- 중 이런 세상을 만들려한 사람이 누가 있었나. 모시던 임금을 내리고 새 왕을 옹립했던 개혁 세력은 권력 구조를 바꿨을 뿐 세상을 바꾼 것은 아니다. 핍박당하는 슬픈 백성들에겐 수탈자가 다른 이름을 쓰는 것 뿐이다. 정여립은 너무 일찍 온 혁명가이다. 지금까지도 우리 정치의 가장 큰 병페인 지역주의의 시작이 이미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여립이 출생한 고을 자체를 없애버릴 정도로 조선은 정여립의 존재에 두려움을 느꼈고, 그가 나온 호남 지방은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차별받고 있다. 과거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 현재다.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이 400년 전의 역모 사건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듯이 지금 우리가 사는 모습은 후세의 삶의 원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