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나다 - 수전 손택의 일기와 노트 1947~1963 수전 손택의 일기와 노트 1
수전 손택 지음, 데이비드 리프 엮음, 김선형 옮김 / 이후 / 201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남의 일기장을 엿보는 것은 그 행위가 은밀한 만큼 죄책감을 들게 한다.

작가가 죽기 전, 아들에게 일기장의 존재를 암시했다고는 하지만 공개 의사를 명확히 밝힌 것은 아니었다.

결혼과 이혼, 동성애와 실연 등 개인의 상처와 치부가 고스란히 일기에 담겼으니 아마도 출판은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들은 출판을 결심했고 고인도 그런 아들의 진심을 알기에 너그럽게 용서할 것이라 믿는다.

 

책은 특정 독자를 대상으로 하지 않았기에 내용과 형식마저 지극히 자유롭다. 그래서 약간 산만한 느낌도 들지만.

 

244쪽. H가 어제 샘 울펀스타인의 어마어마한 장서 얘기를 하던 중에 굉장히 충격적인 말을 했다. 책을 그런 식으로 수집하는 건 "마치 같이 자고 싶어서 결혼하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사실이다.... 그러니까 도서관을 이용하라고!

 

뜨끔했다. 책의 물성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 거라며 당장 읽지도 않을 책을 사 모은 지 몇 년.

몇 개의 책장도 모자라 책을 여기저기 탑처럼 쌓아놓고 사는 나로서는 본말이 전도된 소유욕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위대한 작가일수록 오히려 젊은 시절에 더 깊이 번민하고 방황했음을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책.

그래도 남의 일기장을 엿보는 것이기에 먼저 고인에 대한 예를 갖추고-표지에 실린 작가의 아름다운 사진을 잠시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책을 펼쳐보기를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장경 - 개정판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장경>은 1976년 발표된, 조정래의 첫 장편소설이다. 1970년 등단 이후 1983년 <태백산맥>의 대장정을 시작하기까지 조정래 소설은 대부분 중단편이었기에, 등단과 대하소설 집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대장경>의 이질감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국난 극복과 호국 불교라는 거대 담론의 그늘에 가려져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래서 더욱 빛나는 민초들의 삶을 오롯이 담아낸다는 점에서 조정래 문학의 큰 흐름과 맥을 같이한다.

 

외적에게 도읍을 내어주고도 뚜렷한 대책 없이 적들이 제발로 물러가는 요행을 바라고만 있는 무능하고 무기력한 임금과 제 앞길만 살피는 신료들. 외적의 칼에 가족을 잃고 유리걸식하면서도 나라와 임금을 위해 주어진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는 승려와 백성들. 국난 앞에서 명확히 드러나는 두 주체의 대비는 그 자체로 조정래 문학의 주제 의식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조정래 대하소설의 마중물이라고 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고요한 아침의 나라'나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 같은 후대의 자찬은 힘없이 주리며 살다가 약탈과 전쟁 중에 스러진 민초들에게는 공허한 수사가 아니었을까? 평화와 안정을 지키지 못한 임금과 신하의 과오를 죽음으로 감당해야 했던 고려 민중들의 가혹한 운명이 여전히 반복되는 것은 아닐까? 30년 전 발표된 <대장경>이 오늘의 우리 사회를 비추는 거울로도 손색이 없음이 씁쓸하기만 하다. 중생들의 팔만 사천 번뇌는 아직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지만, 필생(筆生)과 각수(刻手)가 혼신을 다해 한 자 한 자 새겨나간 팔만 사천 법문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지금 우리의 삶이 이름 모를 선조들의 피와 땀으로 이어진 것임을 우직하게 증명하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반 일리치의 죽음 창비세계문학 7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강은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심리학에서 배운 죽음의 수용 5단계의 톨스토이 판 임상 보고서. 삶에 지쳐서 죽음은 안중에도 없는 우리에게 문학은 죽음을 대비하라는 경고음을 툭툭 내보낸다. 소 귀에 경 읽기지만. 그래도 누구에게나 죽음은 공평한 것. 제 잇속만 차리는 주변 사람들도 머지 않아 제 몫의 죽음을 맞이할지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F/B1 일층, 지하 일층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분명 소설은 오락거리였다. 소설의 즐거움은 상당 부분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흥분에서 온다.

하지만 영화, 드라마, 게임 등등 영상 매체의 홍수에 휩쓸려 소설의 오락적 기능은 난파선처럼 떠밀려갔다.

오늘날 현실은 더욱 더 드라마틱하여 국지적인 전쟁과 테러가 세계 이곳저곳에서 일어나는 한편,

나라 안에서는 인터넷 뒷공간에서조차 듣도보도 못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을 살아가는 소설가들은 새로움의 경주에서 패배한 것을 깨끗이 인정하거나

아예 새로움의 종목은 없었던 것 마냥 얼버무린 채 소설의 다른 종목을 발굴하는 데 애쓴다.

예를 들어 자기 안의 양면성 종목, 다중인격 종목, 가족과 연인 등 온갖 관계의 얽히고설킴 종목 등등.

 

김중혁은 동시대의 다른 소설가들에 비해 맷집이 좋다고 하겠다.

여전히 새로움과 신선함의 끈을 놓지 않고 영상 매체와 한판 승부를 벌이고 있으니 말이다.

그 우직한 시도만으로도 박수 받을 만하다.

도시 건물의 밑둥과 공터(<C1+y:[8]:>), 냇가 백사장(<냇가로 나와>), 전 여자친구의 집 뒷편 야산(<바질>).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을 이야기라는 프리즘에 투과시켜 은밀하고 슬프고 무섭고 감동적인 공간으로 만드는

현대의 연금술사.

 

7편의 이야기가 겨룬 새로움과 재미 종목의 최종 승자는 <유리의 도시>이다.(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가장 몰입해서 읽었고,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까지 요즘 표현으로 심장이 쫄깃했다. 

영상과 겨뤄볼 만한 이야기다.

<1F/B1>의 빌딩 속 어둠보다는 인간을 향해 덩굴을 뻗는 <바질>의 바질 덤불이,

그보다는 느닷없이 하늘에서 떨어져 산산조각 나는 <유리의 도시>의 유리가 새롭고 무서웠다.

가장 무서운 공포는 가장 가까이 존재한다는 명제에 공감하게 된다.

물론 금속 원소 여럿의 짜깁기 이름 냄새가 물씬 났던 '알루미누코바륨'은 역시 사전에도 검색에도 나오지 않았다.

워낙에 극비 자료라서 어느 연구자의 머릿속이나 국가 정보기관의 금고 안에만 존재할지 모르지만.

 

"불투명하고 사라지기 쉬운 마술의 세계보다는 눈앞에 돈이 보이는 현실의 세계가 더 중요한 시기였다." - <크라샤> 262쪽

단편의 주제와는 거리가 있는 이 문장이 마음에 머문 것은 요즘 들어 더욱 무겁게 체감하는 삶의 무게 때문일까?

새로움이 의미 있는 것은 소설의 이편에 자리잡은 삶의 평범함과 비루함 때문일지도.

그리고 덧붙이는 김중혁식의 유머.

"동시에 일어난 수많은 일들에 시달리느라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질 때면 그 이유를 생각해보곤 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고난의 묶음판매에 재미를 붙이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낱개로 고난을 던져줄 때보다 묶음으로 고난을 안겨줄 때 고난의 효과가 커진다.

낱개의 고난을 여러 번 겪는 것보다 원 플러스 원 고난을 한 번 겪고 나면 저절로 하느님을 찾게 되니까." - <크라샤> 266쪽

호사다마.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 동서양 보편의 진리가 말장난 속에 녹아 서글프면서도 웃게 된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너도 그렇구나 하는 교감. 소설의 또 다른 힘.

 

단편이라는 틀의 한계 때문에 열린 결말로만 보기에는 다소 느닷없고 허무한 결말은 조금 아쉬었다.

새롭고 신선한 이야기가 주는 충격은 안타깝게도 영상 매체에 길들여진 눈과 귀의 변죽만 울리고 간다. 

그래도 다음을 기대한다. 틈틈이 <빨간 책방>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엄밀하게 따지면 차이가 있겠지만, 팟캐스트보다 해적방송이라는 단어가 더 맛나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리 - 2010 제34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청춘 3부작
김혜나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한 친구는 이 책을 진작에 읽고 싶었지만, 서점에서 다른 사람들 눈치가 보여 몇 번이나 들었다 놓기만 했다고 한다.

도발적인 표지에, 한때 유행했던 야설을 연상시키는 자극적인 성애 묘사.

하지만 <제리>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현대소설을 관류하는 지배적인 키워드, 지겨울 만큼 익숙하지만 여전히 궁금한 주제, 관계.

 

대단한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향기로운 임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임의 얼굴에 눈멀어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는 그런 임은 여기 없다.

그런 임이 없기에 임에 대한 기대도 지극히 소탈하다.

"그냥 가만히 있어 줘. 일부러 노래하고 춤추고 술 마시지 말고, 그냥 내 옆에 앉아만 있어 줘." - 41쪽

자신이 어떤 존재이고, 무엇을 꿈꾸는지 고민하지 않는다면 어떤 관계를 원하는지도 알 수 없다.

교성과 비명도 구분하지 못하고 수컷의 힘만 과시하는 '강'과는 섹스만 있을 뿐 관계는 없다.

돈을 매개로 우연히 만난 '제리'는 관계의 욕구를 채워줄 대안일까? 그렇게 믿는 순간, 제리는 침묵한다.

옆에 오는 누구와든 영원한 관계를 꿈꾸지만 언제나 기대는 배신당한다.

문제가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기에 적절한 해답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관계를 위한 관계는 집착을 낳을 뿐이다.

나는 그가 사라져 버렸다 해도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나를 이 여관방에 남겨 둔 채 떠나 버린 것이 아니라, 내 몸속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니 말이다. 그가 영원히 내 안에, 나와 함께 자리하리라, 그렇게 믿어 볼 요량이었다.

- 124쪽

제리와 처음 관계를 가진 후의 마음이다. 물론 헛된 믿음이다. 내 몸속에 잠시 들어왔다 사라진 제리는 나와 함께 영원하지 않다. 딱히 뚜렷한 이유도 없이 연락은 단절된다. 힘없는 믿음도 사라진다.

 

자아를 발견하거나 한 단계 성숙하기 위한 관계가 아니라

혼자 남는 것이 두려워 자신의 빈 자리를 타인의 존재로 채우기 위한 관계를 찾는 것은 위험하다.

일시적인 충족과 안온함을 느낄 수 있을지 몰라도

언젠가 타인은, 심지어 배우자나 가족이라 할지라도, 불현듯 내 곁을 떠나갈 것이므로...

차라리 불같은 고통을 선사하는 피어싱이 관계의 괜찮은 대안일 수는 있겠다. 살을 찢는 고통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예상대로 믿음대로 찾아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옥의 불구덩이에 던져지지 않은 이상, 고통을 지속하여 존재의 의미를 찾는 것은 현실에서 가능하지도 않고 관계 문제의 정답은 더더욱 아니다.

 

기대했던, 그리고 믿었던 제리 역시 사라졌다.

눈을 떴을 때, 제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밖으로 나가지도, 내 안에 들어와 있지도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신기루와 같이 그냥 사라져 버렸다. - 219쪽

 

결말. 제리와 마지막으로 사랑을 나눈 노래방 한켠, 수족관.

손을 넣어 잡으려 했던 금붕어는 손을 뻗을수록 사라져 가지만, 손에 닿은 물이 서서히 나를 채운다.

그 안에서,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물이, 나를 에워싸며 잡아 주고 있었음을 또한 느낄 수 있었다. ... 숨을 들이쉬고 내쉴 적마다 내 몸은 점점 더 크게 벌어졌다. 몸은 끊임없이 부풀어 올랐고, 나는 아주 천천히, 물결을 따라 내 몸을 움직여 나갔다. 이내 문이 열리고 수없이 많은 내가, 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 222쪽.

이렇게 소설은 끝난다. 타인으로 채우려 하던 자리에 내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 그 작지만 큰 변화에 이 소설의 주제 의식이 오롯이 담겨 있을 것이다. 소설의 얼개는 단순했지만, 피상적인 관계의 더께 위에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현대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지 않다고 읽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