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F/B1 일층, 지하 일층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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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소설은 오락거리였다. 소설의 즐거움은 상당 부분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흥분에서 온다.

하지만 영화, 드라마, 게임 등등 영상 매체의 홍수에 휩쓸려 소설의 오락적 기능은 난파선처럼 떠밀려갔다.

오늘날 현실은 더욱 더 드라마틱하여 국지적인 전쟁과 테러가 세계 이곳저곳에서 일어나는 한편,

나라 안에서는 인터넷 뒷공간에서조차 듣도보도 못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을 살아가는 소설가들은 새로움의 경주에서 패배한 것을 깨끗이 인정하거나

아예 새로움의 종목은 없었던 것 마냥 얼버무린 채 소설의 다른 종목을 발굴하는 데 애쓴다.

예를 들어 자기 안의 양면성 종목, 다중인격 종목, 가족과 연인 등 온갖 관계의 얽히고설킴 종목 등등.

 

김중혁은 동시대의 다른 소설가들에 비해 맷집이 좋다고 하겠다.

여전히 새로움과 신선함의 끈을 놓지 않고 영상 매체와 한판 승부를 벌이고 있으니 말이다.

그 우직한 시도만으로도 박수 받을 만하다.

도시 건물의 밑둥과 공터(<C1+y:[8]:>), 냇가 백사장(<냇가로 나와>), 전 여자친구의 집 뒷편 야산(<바질>).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을 이야기라는 프리즘에 투과시켜 은밀하고 슬프고 무섭고 감동적인 공간으로 만드는

현대의 연금술사.

 

7편의 이야기가 겨룬 새로움과 재미 종목의 최종 승자는 <유리의 도시>이다.(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가장 몰입해서 읽었고,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까지 요즘 표현으로 심장이 쫄깃했다. 

영상과 겨뤄볼 만한 이야기다.

<1F/B1>의 빌딩 속 어둠보다는 인간을 향해 덩굴을 뻗는 <바질>의 바질 덤불이,

그보다는 느닷없이 하늘에서 떨어져 산산조각 나는 <유리의 도시>의 유리가 새롭고 무서웠다.

가장 무서운 공포는 가장 가까이 존재한다는 명제에 공감하게 된다.

물론 금속 원소 여럿의 짜깁기 이름 냄새가 물씬 났던 '알루미누코바륨'은 역시 사전에도 검색에도 나오지 않았다.

워낙에 극비 자료라서 어느 연구자의 머릿속이나 국가 정보기관의 금고 안에만 존재할지 모르지만.

 

"불투명하고 사라지기 쉬운 마술의 세계보다는 눈앞에 돈이 보이는 현실의 세계가 더 중요한 시기였다." - <크라샤> 262쪽

단편의 주제와는 거리가 있는 이 문장이 마음에 머문 것은 요즘 들어 더욱 무겁게 체감하는 삶의 무게 때문일까?

새로움이 의미 있는 것은 소설의 이편에 자리잡은 삶의 평범함과 비루함 때문일지도.

그리고 덧붙이는 김중혁식의 유머.

"동시에 일어난 수많은 일들에 시달리느라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질 때면 그 이유를 생각해보곤 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고난의 묶음판매에 재미를 붙이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낱개로 고난을 던져줄 때보다 묶음으로 고난을 안겨줄 때 고난의 효과가 커진다.

낱개의 고난을 여러 번 겪는 것보다 원 플러스 원 고난을 한 번 겪고 나면 저절로 하느님을 찾게 되니까." - <크라샤> 266쪽

호사다마.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 동서양 보편의 진리가 말장난 속에 녹아 서글프면서도 웃게 된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너도 그렇구나 하는 교감. 소설의 또 다른 힘.

 

단편이라는 틀의 한계 때문에 열린 결말로만 보기에는 다소 느닷없고 허무한 결말은 조금 아쉬었다.

새롭고 신선한 이야기가 주는 충격은 안타깝게도 영상 매체에 길들여진 눈과 귀의 변죽만 울리고 간다. 

그래도 다음을 기대한다. 틈틈이 <빨간 책방>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엄밀하게 따지면 차이가 있겠지만, 팟캐스트보다 해적방송이라는 단어가 더 맛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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