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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 - 개정판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0년 12월
평점 :
일시품절
<대장경>은 1976년 발표된, 조정래의 첫 장편소설이다. 1970년 등단 이후 1983년 <태백산맥>의 대장정을 시작하기까지 조정래 소설은 대부분 중단편이었기에, 등단과 대하소설 집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대장경>의 이질감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국난 극복과 호국 불교라는 거대 담론의 그늘에 가려져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래서 더욱 빛나는 민초들의 삶을 오롯이 담아낸다는 점에서 조정래 문학의 큰 흐름과 맥을 같이한다.
외적에게 도읍을 내어주고도 뚜렷한 대책 없이 적들이 제발로 물러가는 요행을 바라고만 있는 무능하고 무기력한 임금과 제 앞길만 살피는 신료들. 외적의 칼에 가족을 잃고 유리걸식하면서도 나라와 임금을 위해 주어진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는 승려와 백성들. 국난 앞에서 명확히 드러나는 두 주체의 대비는 그 자체로 조정래 문학의 주제 의식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조정래 대하소설의 마중물이라고 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고요한 아침의 나라'나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 같은 후대의 자찬은 힘없이 주리며 살다가 약탈과 전쟁 중에 스러진 민초들에게는 공허한 수사가 아니었을까? 평화와 안정을 지키지 못한 임금과 신하의 과오를 죽음으로 감당해야 했던 고려 민중들의 가혹한 운명이 여전히 반복되는 것은 아닐까? 30년 전 발표된 <대장경>이 오늘의 우리 사회를 비추는 거울로도 손색이 없음이 씁쓸하기만 하다. 중생들의 팔만 사천 번뇌는 아직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지만, 필생(筆生)과 각수(刻手)가 혼신을 다해 한 자 한 자 새겨나간 팔만 사천 법문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지금 우리의 삶이 이름 모를 선조들의 피와 땀으로 이어진 것임을 우직하게 증명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