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리 - 2010 제34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청춘 3부작
김혜나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한 친구는 이 책을 진작에 읽고 싶었지만, 서점에서 다른 사람들 눈치가 보여 몇 번이나 들었다 놓기만 했다고 한다.

도발적인 표지에, 한때 유행했던 야설을 연상시키는 자극적인 성애 묘사.

하지만 <제리>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현대소설을 관류하는 지배적인 키워드, 지겨울 만큼 익숙하지만 여전히 궁금한 주제, 관계.

 

대단한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향기로운 임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임의 얼굴에 눈멀어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는 그런 임은 여기 없다.

그런 임이 없기에 임에 대한 기대도 지극히 소탈하다.

"그냥 가만히 있어 줘. 일부러 노래하고 춤추고 술 마시지 말고, 그냥 내 옆에 앉아만 있어 줘." - 41쪽

자신이 어떤 존재이고, 무엇을 꿈꾸는지 고민하지 않는다면 어떤 관계를 원하는지도 알 수 없다.

교성과 비명도 구분하지 못하고 수컷의 힘만 과시하는 '강'과는 섹스만 있을 뿐 관계는 없다.

돈을 매개로 우연히 만난 '제리'는 관계의 욕구를 채워줄 대안일까? 그렇게 믿는 순간, 제리는 침묵한다.

옆에 오는 누구와든 영원한 관계를 꿈꾸지만 언제나 기대는 배신당한다.

문제가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기에 적절한 해답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관계를 위한 관계는 집착을 낳을 뿐이다.

나는 그가 사라져 버렸다 해도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나를 이 여관방에 남겨 둔 채 떠나 버린 것이 아니라, 내 몸속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니 말이다. 그가 영원히 내 안에, 나와 함께 자리하리라, 그렇게 믿어 볼 요량이었다.

- 124쪽

제리와 처음 관계를 가진 후의 마음이다. 물론 헛된 믿음이다. 내 몸속에 잠시 들어왔다 사라진 제리는 나와 함께 영원하지 않다. 딱히 뚜렷한 이유도 없이 연락은 단절된다. 힘없는 믿음도 사라진다.

 

자아를 발견하거나 한 단계 성숙하기 위한 관계가 아니라

혼자 남는 것이 두려워 자신의 빈 자리를 타인의 존재로 채우기 위한 관계를 찾는 것은 위험하다.

일시적인 충족과 안온함을 느낄 수 있을지 몰라도

언젠가 타인은, 심지어 배우자나 가족이라 할지라도, 불현듯 내 곁을 떠나갈 것이므로...

차라리 불같은 고통을 선사하는 피어싱이 관계의 괜찮은 대안일 수는 있겠다. 살을 찢는 고통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예상대로 믿음대로 찾아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옥의 불구덩이에 던져지지 않은 이상, 고통을 지속하여 존재의 의미를 찾는 것은 현실에서 가능하지도 않고 관계 문제의 정답은 더더욱 아니다.

 

기대했던, 그리고 믿었던 제리 역시 사라졌다.

눈을 떴을 때, 제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밖으로 나가지도, 내 안에 들어와 있지도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신기루와 같이 그냥 사라져 버렸다. - 219쪽

 

결말. 제리와 마지막으로 사랑을 나눈 노래방 한켠, 수족관.

손을 넣어 잡으려 했던 금붕어는 손을 뻗을수록 사라져 가지만, 손에 닿은 물이 서서히 나를 채운다.

그 안에서,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물이, 나를 에워싸며 잡아 주고 있었음을 또한 느낄 수 있었다. ... 숨을 들이쉬고 내쉴 적마다 내 몸은 점점 더 크게 벌어졌다. 몸은 끊임없이 부풀어 올랐고, 나는 아주 천천히, 물결을 따라 내 몸을 움직여 나갔다. 이내 문이 열리고 수없이 많은 내가, 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 222쪽.

이렇게 소설은 끝난다. 타인으로 채우려 하던 자리에 내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 그 작지만 큰 변화에 이 소설의 주제 의식이 오롯이 담겨 있을 것이다. 소설의 얼개는 단순했지만, 피상적인 관계의 더께 위에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현대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지 않다고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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