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을 읽는 중간 중간 눈을 감는 것은 바뀌어가는 나의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한 작품을 다 읽고 나면 눈을 뜨고도 꿈을 꾸었다. 내 주위의 세계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달라진 내가 나도 잘 모르는 신세계를 거니는 모습이 감고 있는 눈망울에 비쳐졌다.

그것은 단순한 정서적인 또는 지적인 성장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건 새로이 무엇으론가 바뀌는 것이었다. 변신變身이었다. 나는 크눌프가 되고 토니오 크뢰거가 되어가고 있었다. 읽기는 나의 재창조였다. 아니 신생新生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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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복老福! 참 좋은 말이다. ‘늙을 로老’ 자가 붙은 말 중에서 가장 근사한 말이다. 로는 ‘늙을 로’ 말고도 세 가지의 복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른 로’, ‘노인 대접할 로’, 그리고 또 하나, ‘익숙할 로’이다.

그러기에 노약, 노쇠, 노망 따위로 흉측하게만 로를 쓰고 말 수는 없다. 노련은 재기 발랄하고 노숙은 완벽하다. 장로長老라면 으뜸가는 어르신을 떠받드는 말이다. 그래서 남들에게 대접받고 잘 단련되어 있고 무슨 일에나 익숙한 것이 다름 아닌 로,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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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한다. 거기 비해 노인의 죽음은 탈 대로 탄 불길이 절로 삭아서 꺼지는 것과 같다고 여긴다.

과일의 경우도 비슷할 것 같다. 덜 익은 열매는 나뭇가지에서 억지로 비틀고 뒤틀어서 잘라내야

떨어지게 된다. 하지만 익을 대로 익은 열매는 저절로 떨어지기 마련이다.

인간의 목숨 또한 마찬가지이다. 청년에게서는 폭력을 써야만 목숨을 빼앗을 수 있을 테지만

노인에게서는 그렇지가 않다. 성숙의 당연한 결과로 목숨이 다하게 된다.

노인의 경우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배가 오랜 항해 끝에 드디어 육지를 바라보고 포구에

근접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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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늦지 않았다 - 마쓰모토세이초, 반생의 기록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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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몇 달째 이 부분이 내 가슴속에서 떠나질 않고 있다.
잊혀지기는 커녕 점점 내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다.
내 삶에 대한 통철한 반성을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하루는 퇴근하고 집에 가는 도중에 귀중한 샤프를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다. 평상시처럼 늘 군화를 신고 기차 선로를 따라 왕복해서 출퇴근할 때였는데, 샤프가 없어진 것을 뒤늦게야 알고서 급히 되돌아가 찾아봤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자갈이 수북히 깔려 있는 선로에서 가늘고 작은 샤프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나는 이따금 지나가는 열차에 신경을 쓰면서 한 시간 가까이 허리를 구부리고 자갈 위를 뒤졌다. 이윽고 해가 져서 어두워지자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 선로 주변으로 달려가 찾아봤지만 샤프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샤프는 다시는 찾지도, 그 이후로 사지도 못했다. 그 뒤로는 신문사에서 쓰는 3B 연필을 사용했는데, 연필심이 너무 물러서 수첩에 쓰기에 적당하지 않았고, 또 너무 빨리 닳아서 칼을 가지고 다녀야 했다. 그런 식으로 퇴근한 뒤부터 매일 밤늦게 소설을 썼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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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늦지 않았다 - 마쓰모토세이초, 반생의 기록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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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업이 없는 일요일에는 갈 곳이 없었다. 집에 있자니 짜증이 나고, 밖에 나가도 공허함이 채워지지 않았다. 사람 많은 거리를 걸으면 이유 없이 화가 났다. 일을 하거나 장기나 마작을 두고 있을 때면 이마에서 식은 땀이 흘러서 수건을 달고 다닐 정도로 약해서, 동료들이 나를 보고 웃곤 했다. 밤에도 잠을 자지 못했으니, 어쩌면 신경쇠약이었는지도 모른다.
고쿠라에서 산을 넘으면 세토 내해와 닿은 해안이 있다. 그곳으로 가는 중간에 산처럼 쌓은 석탄 더미와 시멘트 회사의 채석장이 있고, 산자락을 돌면 반도에서 튀어나온 모지 뒤쪽으로 길이 이어졌다. 나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마쓰가에라는 곳에 내려서 정처 없이 바닷가를 걸었다. 저 멀리 인적 없는 해변너머로 이름 모를 작은 섬이 보였다.
그 모래사장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고 소나무 숲을 거닐기도 했다. 식구들이 바글거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지긋지긋했지만, 밖에 나가 돌아다닐 곳이 없었다. 만약 그 때 내게 조금만 직접적인 동기가 주어졌다면, 어쩌면 자살을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주변으로는 그런 강한 동기조차 없었고, 그저 불쾌한 타성에 온몸이 젖어 있었다. 신경은 곤두서 있는데도 몸이 나른하고 머리는 무뎌지고 있었다.
책 한 권 읽을 기분도 들지 않았다. 독서를 하는 것도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빗자루 장사를 하느라 야간열차를 타고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와 사가 일대를 왕복하던 것도 어느새 먼 과거의 일이 되어 있었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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