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잘 웃는 아이였다. 그 웃는 모습 때문에, 눈웃음친다고 오해를 받은 적도 있다. 웃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웃지 못 할 이유도 없었다. 그냥 웃고 싶은 일에 웃는 게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커가면서 점점 웃음은 줄어들었다. 웃어야 하는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계산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럴 이유가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언젠가부터 웃음에 인색해졌다는 것밖에는... 웃음이 줄어들었던 그때, 같이 줄어든 게 있었다. 웃는 것만큼이나 우는 일도 많지 않았다. 슬프고 아프면 울어도 되는 거였는데, 점점 그 울음마저도 자유롭지 못했다. 울면 안 되는 순간이 많아진 거다. 남들이 볼까 봐, 혹시 그 눈물에 계산이 있다고 생각할까 봐, 자존심이 상해서. 혼자 참 많이도 계산했다. 계산기를 마구 두드려보니 울면 안 되는 순간이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기에 더해진 건, 감각이 둔해져서이기도 하다. ‘그게 울 일인가?’ 하는 생각이 감정에 파고들었을 때, 울음은 약해지고 사라졌다. 울 여유가 없다고 여겼던 거다. 사는 일에 치여서 눈물 따윈 사치처럼 여겨지기도 했던 날들. 어떤 이유로든,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눈물은, 일상에서 그리 좋은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그런 눈물이 그리워지는, 한번 울고 나면 속이 좀 풀리고 시원해질 것 같은 날이 있다. 습관이란 게 무섭기도 하지. 이상하게도 그런 날마저 눈물은 잘 나지 않더라는. 그럴 때는 눈물도 감정도 너무 메말라버린 삶에 괜히 화가 나기도 했다. 어느 순간을 버티고 넘어가는 일에 눈물이 답은 아니지만, 눈물이 풀어주는 게 분명 있다는 걸 아는데도 울지 못하는 것도 답답하고, 우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 일상이 마냥 아쉬워서... 그런 누군가의 마음을 알아서였나. 『아주, 조금 울었다』의 저자 권미선은 누군가의 마음을 들여다본 듯, 아니, 어쩌면 그 누군가와 같을 수밖에 없는 마음을 숨기지 못한 것처럼 눈물이 필요한 순간을 풀어냈다. ‘누군가와 함께’가 아닌 ‘오롯이 혼자’일 때 꺼내놓을 수 있는 마음을 들려준다. 혼자여도, 뭐가 잘 맞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어느 순간 외로워질 때 같은, 이대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순간의 마음을 드러낸다. 밀려오는 감정이 모두 외로움이라는 종착역으로 가 닿으려고만 애쓰는 것 같아서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하나도 안 괜찮은 마음으로 남아있을 때. ‘어떻게 하지?’ 라는 물음에 터져버린 답.

 

 

그냥 혼자여도 괜찮았는데,

누군가를 찾았을 때 대답이 없다는 건,

외로워지는 일이다.

그땐 진짜 혼자라는 생각이 드니까.

그럼, 원래부터 혼자인 존재는 외롭지 않을까? (아주, 조금 울었다 15페이지)

 

 

말들이 아무 위로가 되지 않을 때가 있거든.

우리는 잘 모를 때 말을 더 많이 하게 돼.

잘 모르니까 애쓰는 거야.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아주, 조금 울었다 32페이지)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울고 싶을 때, 울어야만 하는 때를 그대로 확인하는 기분이 들어서 순간순간 울컥해지는 문장들이 담겼다. 안 되는 거 아는데도 쉽게 포기가 안 될 때, 헤어졌다는 걸 인지하는데도 문득 생각나서 힘들 때, 일상이 버거워서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을 때, 다 지나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어서 계속 아플 때. 일부러 찾지 않아도 끊임없이 밀려오는 그리움, 외로움의 시간이 콕콕 파고드는 순간들이 덩어리가 되어 올 때. 오지 말라고 해서 안 올 감정도 아니고, 머물지 말라고 해서 떠날 감정도 아닌 것들을 해결할 방법이 되기도 하는. 애써 참았던, 울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순간을 버리면서 느슨해지는 일이 필요할 때 ‘조금’이 아니라 ‘많이’, ‘펑펑’ 울어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혼자인 시간에, 혼자이기 때문에 울어도 되는 거 아니었나? 꼭꼭 닫아두지 말고 문고리 하나 살짝 풀었더니 쏟아지는 건 자동. 차마 다른 사람 앞에서 꺼내지 못한 진심이, 나와 마주하게 된 순간에 고백처럼 토해져 나오고야 마는, 그렇게 울어도 되는 일이었던 것을 왜 몰랐을까. 내가 봐주면 되는 거였는데 말이지.

 

 

그녀는 펴지지 않는 우산을 손에 들고,

길 한복판에 서서 그렇게 울었다.

사람들이 흘깃거리며 그녀를 쳐다봤지만,

그녀는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살다 보면, 그렇게 울음이 터질 때가 있다.

그럴 땐 그냥 울어야 한다.

운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울지라도 못하면 도대체,

어떻게 견딘단 말인가.

 

울고 나면, 그리고 비가 그치고 나면

그녀의 인생에도 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아주, 조금 울었다 161페이지)

 

 

참아야 하는 게 많아지는 인생에서, 어느 순간 눈물도 참아야 할 목록에 담아져버렸다. 누가 참으라고 강요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버렸다. 그렇게 참다 보니, 뭔가 자꾸 쌓였다.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가슴 속에 쌓이기만 했다. 한꺼번에 터져 나오기 전에, 미처 꺼내놓지 못한 진심을 마주하고 싶을 때 울어도 좋겠다고, 아마도 작가는 그런 말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짧은 문장들에서 번져 나오는 건 깊은 곳에서 끌어낸 마음들이었다. 누구에게나 그 마음이 읽힌다는 건, 누구에게나 그런 마음이 있다는 거, 아닌가? 들어달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마음 때문에 공감하는 거니까. 눈물 섞인, 물기 가득 촉촉한 문장으로 마음을 읽는 시간을, 이렇게 풀어놓는다. 울어도 좋은 거니까, 안심하고 둑 터지듯 실컷 울어보라고...

 

 

이런 부족의 이야기가 있다.

카리브 해에 산다는 그 부족은 여자가 남자를 선택한다고 한다.

그리고 여자는 언제든 새로운 남자와 함께 살 수도 있다.

만약 새로 살고 싶은 남자가 생기면,

여자는 지금 함께 사는 남자의 짐을 싸서 문 앞에 놓아둔다.

저녁에 집에 돌아온 남자는 그 보따리를 보고 안다.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걸, 그래서 떠나야 한다는 걸.

그럼 남자는 보따리를 안고 울면서 어머니 집으로 되돌아간다.

 

속수무책으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그런 이별의 순간들이 있다.

 

그녀의 마음에는 이제 그가 없었고,

그래서 그는 울면서 떠나고 있었다. (아주, 조금 울었다 108~109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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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장미 2018-01-25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바껴서 또 사고 싶어지는 간사한 마음이;;;;

구단씨 2018-01-26 17:17   좋아요 0 | URL
아, 표지가 바뀐 건가요? 저는 원래 표지가 이런줄 알았어요.
도서관에서 읽어서 원래의 표지 디자인을 몰랐네요. ^^;;;
 

 

 

수용소군도 세트

 

 

 

 

 

 

 

 

 

 

 

 

 

히가시노 게이고 연애의 행방

 

 

 

 

 

 

 

 

한글자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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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마치 이 세상에 정해진 답은 없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남들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한다고 해서 꼭 정해진 대응을 할 필요도 없는 게 아닐까. 모두 다르니까, 나같이 '정상에서 벗어난 반응'도 누군가에겐 정답에 속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75페이지)

 

십 년쯤 전엔가, 친구가 이런 말을 했었다. 사람이 나이를 먹을수록 배려가 많아진다는 거였는데, 그 말을 듣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타인을 향한 마음이 점점 열리는 걸 이야기하는 건가 싶었다. 그렇지. 나이를 먹어가면서 남들을 보는 눈도 더 넓어야겠고, 마음을 열어놓는 것도 더 크게 해야겠지, 라고 생각하던 때였기 때문이었나. 아니면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거라고 어딘가에서 읽어서였나. 그런 생각으로 동의한다는 제스처를 취하려고 했는데, 그 친구는 자기가 한 말에 한마디 더 붙였다.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친구가 하려던 말을 내가 끝까지 듣고 다시 시작한 우리의 대화는 또 다른 의미의 공감을 나누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가 배운 '배려'의 기준이 변해가는 게 자연스러워서, 그 변화를 인지하지도 못한 채로 몸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때 우리는 친구가 꺼낸 말을 시작으로 이런 이야기를 한참 했다. 살면서 나 먼저 위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진다. 다른 사람과 어울려 지내며 공유하고 공감하는 게 필요하지만, 나를 우선하는 마음이 더 커지고 내가 상처받지 않고 손해 보지 않으려는 자세가 세워지고 있더라고. 아프고 슬프고 기쁜 일들의 주체가 내가 되는 것이 당연하고, 나만의 감정으로 채워지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고. 결론은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면서 언제나 내가 우선이 되는 인생이어야 하는 거 아니겠냐고...

 

그때의 기억을 꺼내 이제 와 생각해보니 참 살벌하게 들린다. 그런데 아주 틀린 말은 아니어서, 솔직히 말하면 점점 더 많이 생각하는 부분이라서 그런지, 명확한 답을 꺼낼 수는 없어도 어느 정도의 답을 향해가는 쏠림이 있었다. 사람이 느끼는 감정의 이해보다는, 내가 느끼는 감정의 중요성이 점점 더 커진다는 걸 알아서일까. 이 소설의 시작과 동시에 들려오는 윤재의 상태에서, 나는 그게 큰 문제인가 하는 의문을 먼저 가졌다. 다른 사람과 느끼는 게 다르다는 것, 그게 우리 사는 세상에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분명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세상인 건 맞지만, 그들의 감정을 모른다고 해서 사는 데 지장이 있는 건 아닐 테니. 나이를 먹고 이런저런 사람들을 겪으면서 그 냉정함이 더 심해지고 있었는데, 며칠 전 김정숙 여사의 행동을 보고 이 소설의 의도와 결말이 향하는 지점과 닮았음을 알았다. 평범한 아줌마 차림의 영부인이 이삿짐을 싸다 말고 나와서 60대 여성 민원인의 이야기를 듣는 장면에서,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라면이라고 먹고 가라며 데리고 올라가는 모습에서 우리가 살면서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게 공감 능력이라는 것을... 그 민원인이 하는 말을 들어주는 것 말고 영부인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그런데도 다 듣고 있더라. 영부인은, 잘은 모르지만 민원인의 이야기를 다 들어준 것과 끼니를 거른 민원인에게 내놓은 라면 하나가 전부였다. 그 민원인도 안다, 영부인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그래도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니 마음이 편하다면서 이제 다시 찾아오지 않겠다고 했다더라.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는 것, 누군가의 상황과 감정을 공감하는 것. 다른 사람과 어우러져 사는 세상이라는 걸 전제했을 때, 이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하는 게 있을까? 윤재에게는 그게 없었다. '감정 표현 불능증'을 앓고 있는 윤재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몬드'라고 불리는 편도체가 작아서, 사람의 감정을 느끼는 게 어렵다. 반복된 학습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사람의 감정을 알 수 없다. 공포, 무서움, 분노, 애정, 호감, 등 사람들이 내보이는 그 어떤 감정 앞에서도 윤재는 침착하다. 웃거나 울거나 하지 않는다. 느끼지 못하는 감정 앞에 표정이 바뀌지도 않는다. 그런 윤재의 상태에 엄마는 절망한다. 하지만 윤재의 삶을 위해 같이 노력한다. 여러 가지 상황을 만들고, 사람들이 보이는 보편적인 감정이나 태도를 알려주면서, 그때마다 윤재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익히게 한다. 사실 이런 일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것들인데, 이걸 알지 못하는 윤재는 반복된 학습이 아니면 알 수 없다니. 그것도 다 아는 게 아니다. 그런 상황이나 반응을 이해해서도 아니다. 엄마와 할머니가 그렇다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는 동안 많이 힘들 테니까 배워둬야 한다고 해서 하는 것뿐이지, 윤재가 이해해서 터득한 자세는 아니다.

 

이 소설을 계속 읽을수록, 윤재보다는 윤재의 엄마와 할머니를 떠올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사람의 죽음이 나이순으로 적용되는 건 아니지만, 보통 나이순으로 죽는다고 생각하면 엄마와 할머니가 죽은 다음에 살아갈 윤재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그걸 걱정하는 엄마와 할머니의 표정이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내가 없으면 이 아이는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걱정들. 그래서 더 많이 알려주고 싶고, 더 많이 느끼게 해주고 싶은 간절함이 소설의 곳곳에서 느껴진다. 엄마와 할머니가 참 많이 아프겠구나, 하고 느끼던 그때 비극은 시작된다. 윤재의 열여섯 번째 생일날, 크리스마스이브, 끔찍한 사고로 엄마와 할머니는 윤재의 앞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곤이'가 나타났다.

 

곤이의 등장으로 윤재의 삶이 어떻게 변할지 기대되면서 계속 읽게 되는데, 소설을 잘 이끌었다는 생각이 든다. 윤재와 정반대의 성향을 보이는 곤이였다. 오랜 시간 가족과 떨어져 있다가 이제야 가족에게 돌아온 아이, 그나마 엄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와의 적응이 필요한 아이, 험한 말과 행동으로 자기 주변에 벽을 치는 아이. 그런 곤이와 윤재의 조합은 아이러니하지만, 그게 오히려 윤재의 모습을 더 궁금하게 한다.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다가가는 아이들로 비치지만,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고, 특히 타인의 감정이나 태도에 별 영향을 받지 않는 아이인 윤재가 겪어가는 마음의 변화가 기대되는 거다. 이유는 다르지만 두 아이는 세상 속으로 스며들지 못한다. 그런 아이들이 계속 세상의 한구석에서만 머물러 있어야 하는 건지, 세상에 섞이기 위해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이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도 방법을 같이 찾아보게 하고 있더라. 그 변화를 인지할 무렵 찾아온 또 한 명의 아이 도라. 도라의 등장은 열여섯 소년이 그 나이의 소년으로 살아가는 게 무엇인지 그대로 보여준다. 담담하게 하는 말들 속에서 머리로 배운 태도의 학습이 아닌 마음이 하는 소리가 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불을 끄고 책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내겐 풍경처럼 익숙한 냄새였다. 그런데 거기 무언가 다른 게 실려 있었다. 갑자기 마음속에 탁, 하고 작은 불씨가 켜졌다. 행간을 알고 싶었다. 작가들이 써 놓은 글의 의미를 정말 알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더 많은 사람을 알고 깊은 얘기를 나누고 인간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206페이지)

 

사는 동안 공감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게 하는, '평범'과 '특별'이 공존한다는 것도 그대로 보여주는 소설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모습에 저절로 공감한다. 각자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슬픔으로 눈물이 흐르고, 기쁨의 순간에 웃으면서 손을 맞잡는 일.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에게는 그게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공부하듯 반복적으로 학습해야 하는 일이라는 게 두렵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처음부터 몰랐던 일인데, 자라면서 사람들과 어우러지면서 자연스럽게 배우는 태도이자 감정인데, 그게 불가능하다? 요즘에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보다는, 모른다는 것보다는, 굳이 자기 삶의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 일이 잦아지는 듯하다. 나부터도 그렇고. 나의 상황, 나의 감정이 앞설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아주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다. 어떤 순간이 닥치면 나는 또 나 먼저 생각하고 결정할 테니까. 그러면서도 타인과의 공감이 살면서 아주 많이 필요한 일이라는 건 변함없다. 그런 공감 능력을 점점 잃으면서 사는 게 지금의 우리가 아닐까 하는 문제를 보여주고 싶은 게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작가의 의도야 작가만이 알겠지만...)

 

사는데 필요한 우선이 각자에게 다르게 다가오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감정이 없이 사는 건 안 될 것 같다. 공감이 없는 타인과 삶은 이뤄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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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9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19 14: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당신의 계이름 - 말이 닿지 못한 감정에 관하여
이음 지음, 이규태 그림 / 쌤앤파커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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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감정을 조금씩 떼어 섞고, 주무르고, 이리저리 포개 보아야 그나마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은 난해한 감정이었다. 말로 어떤 장면이 충분히 해석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119페이지)

 

'말'에 대해 생각한다. 머릿속에서 생각하지만 멈춰있는 게 아니라 소리가 되어 나오는 말. 그렇게 쏟아낸 말은 공감을 이루기도 하지만 오해를 부르기도 한다는 걸, 항상 그 말이 어떤 사건의 단초가 되기도 하다는 걸, 안다. 그래서 더 어려운 게 말이 되어버렸다. 언젠가부터 그 말은 점점 줄어들었고, 타인을 이해하는 말은 더 아끼게 되었다. 내가 하는 말의 높이와 상대가 하는 말의 높이가 다르다는 걸을 알게 되면, 말의 아낌은 더 많아진다. 같은 것을 보고 있는데도 다르게 나오는 말들이 우리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아서였다. 그러니 말이라는 건, 그냥 최소한의 의사소통 수단이 되곤 했다. 상대가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적당히,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부담스럽지 않게... 그래서였을까. 말이 줄면서 동시에 표현도 줄어들더라는 이상한 결과를 얻었다. 어쩌면 이상한 게 아니라 너무 당연한 거였는지도 모른다. 말이 줄어드는데, 표현이 늘어날 수가 없지 않은가. 이 책의 부제가 더욱 눈에 들어오는 이유는 그래서였다. '말이 닿지 못한 감정에 관하여' 우리가 이야기하고 싶은 걸 쏟아내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으로 읽기 시작했다.

 

때로는 의도와 상관없이 내뱉은 어떤 말들이 누군가를 난처하고 부끄럽게 만들 수 있다는 걸, 그로 인해 말로 빚을 질 수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나는 그날의 감정을, 살면서 한두 번쯤 의무적으로 마주해야 할 과제쯤으로 생각한다.

변변치 않은 말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다 고른 말이, 못내 미안할 때가. 그렇게 말을 고르더라도 별 소용이 없어서, 말이 모자라다고 생각될 때가. 그런 때가 우리에게 몇 번쯤 있었다. (34페이지)

 

뭐라고 해야 할까. 많은 부분 공감하면서 읽었는데, 막상 그 느낌을 표현하는 게 너무 어려운 책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한다고, 그런 순간을 건너와서 상대와 더 애틋해졌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게 다는 아니었다. 이해나 공감 같은 걸 넘어서서, 말이 전하는 감정을 그대로 느끼고 있다고 말해야 했다. 그가 골목 어귀에서 만난 사람들, 힘들어서 말이 사라질 것만 같은 노동의 현장에서도 이루어지는 말들,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뤄놓은 현재의 삶에 녹아든 흔적들. 세상에 무수히 많은 사람이 그렇게 내놓고 담아가는 말들을 그는 부딪치면서 들었다. 말이 다 하지 못한 말들을 눈으로 마주하고 감정으로 들었던 거다. 늘 말의 뒤에서 의도와 다르게 읽히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순간들을 겪는다. 그런 말이 전하는 외로움을 진정으로 들을 수 있다는 게 위로였고, 공감이었다.

 

나는, 내 위로가 누군가의 슬픔을 기피하려는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슬픔은 늘 일인칭이었다. 누가 대신하여 아파준다는 말은 실행력이 없었다. 누가 먹어준다거나 들어줄 순 있어도, 아파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여, 슬픔을 이해하는 데에는 많은 말들이 필요했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그 슬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성을 다해 주물을 매만져야 보기 좋은 형상이 나오듯, 대상에게 깊이 물이 들어야 구체화될 수 있다. (243페이지)

 

작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이 책도 읽으려고 해서 읽은 게 아니었다. 그저 우연처럼, 실수처럼 내 손에 들어온 책이었다. 그러니 기대도 없었던 건 당연하다. 그렇게 펼친 책에서, 오히려 일부러 골라 읽었던 책보다 더 가깝게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문장들 속에서 작가는 여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어느 부분을 읽다가 작가가 남자라는 걸 알았다. 사실 그런 부분이 아니었다면, 나는 어떤 선입견에 작가가 여자일 거로 생각하고 계속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는 일은 어렵다. 가능하지도 않다. 다만 그 아픔에 내 말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순간이 생겨날 뿐이다. 완전한 치유가 아니라, 그 아픔을 공유하고 있다는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거다. 그건 우리가 말을 '주고받는다'는 걸 증명하는 일이다. 우리가 겪는 슬픔은 늘 우리의 몫이기에, 작가의 말처럼 '슬픔은 늘 일인칭'이기에 누가 대신 아파해주고 이해해준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 불가능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한계를 넘어갈 도구가 필요했다. 내 안의 말이 가 닿아야만 했다. 상대의 슬픔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노력이어야 했다. '뽈'을 차러 가서도 외로운 아버지, 손끝에서 완성되는 옷에 감춰둔 어머니의 자존심, 평생 이어온 이발소를 정리하며 마지막으로 손자의 머리를 잘라주던 할아버지, 아버지의 마음을 읽어보고 싶다며 두부를 팔던 남자. 말은 분명 우리 마음을 전하고 표현하는 수단인데도, 그게 다 전해지지 못하는 미완성으로 남을 때가 많다는 걸 말하려는 걸까. 말이 다 들려주지 못하는 감정들에 다가가기 위한 우리의 몸짓을 이렇게 보여주려는 걸까.

 

말들은 수시로 내게 찾아와 버려지거나 읽혔다. 그건 어머니의 삶이 내 삶에 보내는 안부 같은 걸지도 몰랐다. 그래서 문득, 내가 누군가의 말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내 삶이 한 삶을 품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그러니까, 철을 넘기면서 동시에 말도 넘어온 것과 다름없었다. (202페이지)

 

여전히 밤은 어려웠고, 잠 못 들게 하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해명하는 말들도 어려웠다. 그래서 나이가 든다는 건 말이 쉬워지는 것이라고, 다룰 수 있는 말의 가짓수가 점차 늘어나는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소통은 말로 이뤄지는 게 아닐지도 몰랐다. 누군가에게 아픔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데에는 단순히 ‘말’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일종의 ‘경험’이 필요했다. 대개 말은 누군가에게서 흘러나와 또 다른 누군가에게 들어가고, 그건 한 삶이 다른 한 삶에게 보내는 우편 같은 거니까. 말의 종착지는 결국 누군가의 삶이고, 하여 자신의 범위 내에서 이해 가능할 뿐이라고. (192~193페이지)

 

저마다 가진 말의 높이를 계이름으로 말하며, 그 말의 표현으로 감정을 읽는다. 너무 높아서, 너무 낮아서 닿지 못한 말들 때문에 우리는 외롭고, 아프고, 상처받고, 오해한다. 너무 가벼워서 상대에게 가 닿지 못하고 날아가 버린 말들에 더 외로워지곤 한다. 일상처럼, 습관처럼 주고받는 말에서 우리가 마주한 감정은 상대의 삶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자기만의 사연을 표현하지 못하고, 안부를 묻기 어렵고, 이해가 버거웠던 순간들을 마주할 때 필요한 건 말이었다. 온몸으로 읽어야 하는 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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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거랑 이웃님이 양도해주신 거랑
벌써 다 사용해버려서...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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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4 2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14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