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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1
홍수연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이 뭘까 종종 생각한다. 계절에 상관없이 내가 즐겨듣는 노래는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 책 속 한 구절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진솔의 고백에 '지나가는 바람일지도 몰라요(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이도우)'라고 말하던 건PD의 목소리, 한겨울에도 몸은 중무장을 하고서도 얼굴은 굳이 드러내놓고 맞는 칼바람도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내내 궁금했는데 딱히 그 이유가 생각은 잘 안난다.
아마도, 그 단어가 주는 시원함이 좋아던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가장 크다. 봄 가을에 불어주는 그 선선함과 답답한 마음에 불어줄 것 같은 시원함 같은 거... 아마 그 단어에서 그 의미를 가장 많이 두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아이였던 그 여자에게 그 남자는 바람 같은 것.
바람 : [명사]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
어떻게 이어질 인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눈이 마주쳤었던 그 남자. 아빠처럼 오빠처럼 의지했던 그 남자에게 아이는 관심 받고 싶어했다. 조용히 지낼 수도 있었던 일에 사고를 치고 그 남자가 해결하러 와주기를 기다렸다. 한번만 보고 싶어서. 눈빛 하나 마주치지 못하면서, 마주치는 순간 고개를 숙이면서도 그랬다. 그 아이는 그랬다, 그 남자에게... 그러면서도 웃으며 지내면 다시 돌아온다던 그 남자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여자는 이제 아이가 아닌 여자가 되어 그 남자에게 다가간다. 자신을 몰라봐도 좋다고, 잠깐 불어오는 바람이어도 괜찮다고. 다 줄 수 있어서 오히려 고맙다고...
지킬 것이 많았던 그 남자에게 그 여자는 바람 같은 것.
바람 : [명사] 기압의 변화 또는 사람이나 기계에 의하여 일어나는 공기의 움직임.
몇달 후에 결혼을 한다던 그 남자가 그 여자에게 말한다. "그런데...... 널 원해." 그러한 감정마저 처음이었던 남자가 오직 그 순간만은 솔직하게 말한다. 감추고 참고 기다리고 인내하고 싸우는 법을 익혔던 그 남자에게는 낯설고 생소한 느낌, 해서는 안될 일, 지켜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러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끝이 보일 것을 알지만 늘 익숙하게 그래왔던 것처럼 잘라내고 자신이 책임져야할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강하게 길려저야 하기에 이국 땅에 홀로 남겨진 유원. 엄마의 후배에게 맡겨졌는데, 엄마의 후배 부부는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었던 단 하나의 혈육인 제니. 유원 25살 제니 12살때까지 유원은 제니의 후견인이 되어 보살펴분다. 같이 보고 듣고 함께 하면서... 어색한듯 익숙한듯, 따로였다가 하나였다가... 그리고 더이상은 함께 할 수 없을 때 헤어진 두 사람. 그리고 11년 후, 시드니. 유원은 시드니에 있는 호텔에 지사장으로 오게 되고, 서진(제니)은 스물 셋의 나이로 유원의 곁은 맴돈다. 자신을 못알아보는 유원에게 투정 한번 부리지 않고, 그저 어린 그 나이부터 담아온 마음 하나 불어내어보고자...
"글쎄, 바람......, 같은 것."
약혼자가 있으면서도 서진을 원한다는 유원의 말. 그리고 그 마음을 유원 나름대로 정의한 것이 '바람'이라고 했다.
바람... 바람...... 바람...
어떤 의미로 바람은 긍정적이고 유익한 단어인데, 또 다른 의미로 바람은 불륜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 유원이 말한 '바람'이 어떤 의미였는지는 읽어가는 내내 저절로 알아지지만, 유원이라는 캐릭터의 성격상 절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긍정적일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배워왔고 그렇게 자라왔으니... 너무 조용해서, 너무 원하는게 없어서, 너무 올곧아서 더 위험한 사람. 그래서 정작 원하는 것 한가지를 위해서 모든 것을 미련없이도 내던질 것 같은 사람.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사랑을 위해 왕관을 버렸다는 윈저공이 내내 생각났다. 사람은 돈 앞에서 권력 앞에서 무너지기 쉬운데, 그 사람 평생을 사랑 하나 얻은 걸로 후회없이 살았을까? 소설은 소설일 뿐이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그런데 이만큼의 시간을 살아오면서 어줍잖게 세상을 본 나는 조금은 알겠더라. 현실에서 더 소설 같고 영화 같은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난다는 것을...
그래서일까, 유원을 보면서 내내 속으로 응원하고 있었나보다.
"유원, 너 한번 터트려봐. 어차피 한번뿐인 인생인데, 그 시간동안 니 맘대로 살아온 거 없잖아. 지금이 마지막인 것처럼 제발..."
그는, 그걸 바람이라 했었다.
사람들의 어깨에 무심히 앉았다가 무심히 떠나 버리는.
휘몰아쳐 불어와 모든 것을 감싸 안고, 다시 휘몰아쳐 모든 것을 빼앗아 가 버리는.
사람은 가끔 안될 일 앞에서도 가능하다 믿는 바보 같은 구석이 있나보다. 두 사람, 괜찮을거다 살짝 내려앉았다가 조용히 소리도 없이 떠나버리는 감정이니 별 것 아닌 거라고 자만하면서 불어가는대로 내버려두었을테니... 보이지도 않고 무게감도 없이 흐르는게 전부인 바람이지만, 그것이 가슴에 내려앉는 그 순간의 무게는 아무도 감당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간과했을테지. 그런데, 그마저도 괜찮다고, 그러니 잠깐이라도 그렇게 불어오라고 간절히 바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느 순간 또, 그 바람 멈출지도 모르겠다고 위로하면서? 기다리면서?
결국에는, 그만 불어달라고 애원할 정도였지만...
...... 이제......, 그만 불어라.
이야기의 주인공은 분명 두 사람인데, 내가 보는 방향은 계속 유원의 시선이었던 듯 하다. 유원의 눈으로, 유원의 마음으로, 유원의 웃음과 슬픔으로... 마지막부분에 치달았을 때는, 유원의 그 살기어린 눈빛마저 당연한거라 생각했다. 유원은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래야만 한다고, 그래야 제대로 된 마무리를 할 수 있는거라고. 그래도 뭐, 로맨스의 즐거움은 해피엔딩이지만, 이런 결말 나름 괜찮다. 1권을 읽고나서 지루한 마음과 두께의 압박에 2권을 저리 던져두었는데, 저절로 손이 가더라. 이야기가 흐를수록 마음이 아파서 정말 나중에 얘네들 힘들게 하면 왕회장(유원의 할머니) 내가 가만안두리라 했는데. 이 할머니 참 짓궂게 마무리해주시네. ^^ 생각했던 것보다 이야기 구조가 탄탄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분량이 늘어난 것인지, 그래서 조금은 더 더디고 지루하게 읽혀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옷은 입어보고 사라고 했던 것처럼 책도 끝까지 읽어보고 얘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이 책을 다 읽었을 때가 새벽 한시쯤... 다시 이 글을 작성하고 있었을때가 읽은 다음날 새벽 세시 쯤... 여기에도 바람이 많이 불고 있다...
너는 내가 이루고 싶었던 가장 아름다운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