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를 '그렇구나' 하고 느꼈을 때는 대개 늦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살면서 저절로 깨닫게 되는 일,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다. 뭔가 지나가고 있는 그 순간에는 다 알지 못 하는
일들이, 반드시 시간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나타난다. 절대 공짜로는 알려줄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젊음을 잘 모르고 흘러가 버린 시간에,
노년이 되어 되돌아보고 나니 다가오는 것들 역시 마찬가지다. 노을 지는 저녁 풍경을 바라보듯, 집사라는 자부심으로 온 인생을 채운 스티븐스를
바라보는 내 시선이 그러했다.
집사의 본분이 자기 인생의 모든 것처럼 살아온 스티븐스다.
'달링턴 가'에서 35년을 그렇게 지내오던 중 주인이 바뀌면서 뜻밖에 주어진 시간. 새 주인으로부터 여행을 제안받고 떠나온 길이다. 문득
생각해보니, 스티븐스는 새 주인의 휴가 제안이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달링턴 가에서 스스로 갇힌 듯이 살아온 그의 평생인데, 갑자기 밖으로 밀려난
느낌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떠밀리듯(?) 발걸음을 뗀 여행마저 달링턴 가의 이로움을 위한 목적이라니, 이 남자의 인생 어떻게
흘러왔는지 훤히 보일 지경이다. 새 주인이 시키지도 않은 짓, 오래전에 달링턴 가를 떠난 켄턴 양을 만나러 가는 게 그가 택한 여행의 목적이
된다는 게 안타까울 정도였다. 켄턴 양을 만나는 일도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었다. 혹시나 켄턴 양과 뒤늦은 해후를 하며 황혼의 사랑이라도 만들려는
것일까 기대했건만, 그는 오로지 달링턴 가의 부족한 일꾼 섭외가 목적이었던 거다. 이 여정이 그를 어디로 데려다 놓을지 감히 상상이 안 될
정도로 스티븐스는 나의 예상 밖을 벗어난 인물이 되어갔다.
그렇게 시작된 일주일 동안의 여정에서 그의 시간은 두
가지로 채워진다. 여행길에서 만난 이들과의 대화이거나, 지나온 시간을 반추하며 떠올리는 자기 일(집사)의 뿌듯함과 만족감을 곱씹어보거나. 특히
그가 35년의 집사 일을 떠올릴 때면 아주 위대한 업적을 세운 듯한 표정이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한 위대한 일은 없을 것 같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듯한 그의 현재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인다. 가는 길 곳곳에서 마주하는 아름다운 풍경에 감동하고, 영국의 위대함에
만족스러워하며, 자기가 서 있는 그 순간의 모든 것을 허물없이 받아들인다. 그저 위대함으로...
그의 회고록 같은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면, 그에게
집사계의 공로상이라도 주어야 할 판이다. 그의 젊은 날은 오직 달링턴 가에 머문 흔적밖에 없다. 그마저도 철저한 을로 살아가는 모습만 강조된다.
주인의 심기를 받드는 일이 최우선이며, 그곳에서 열리는 모든 일의 완벽한 마무리까지 그가 주관해야 할 일이었다. 일하는 사람의 관리부터,
저택에서 일어는 모든 일은 완벽해야 했다. 특히 주인이 영국 사회에서 처한 위치나 처세까지 감당해야 했다. 거슬리지 않는 조언도 해야 했으며,
저택을 방문하는 손님들의 품위까지 챙겨야 했다. 당시 영국의 시대적 배경까지 생각하면, 그의 말 한마디나 행동은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하다.
함부로 언급할 상황이 아니었던 거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그는 어느 위치에서 누군가의 시선으로 저택의 사람들을 대해야 했던 걸까. 반유대주의에
앞장서야 했는지, 아니면 그에 반대하여 켄턴 양의 화에 동참해야 했는지... 여기서 또 한 번 그의 집사 자리가 그의 말처럼 우아하고 위대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파고든다. 그는 여전히 달링턴 가의 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앞날을 무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니면, 집사의 자리가
평생 그러한 것이라는 걸 몸에 새기고 살아온 습관이거나. 어쨌거나, 그가 임무를 완수하는 모든 시간의 행동과 선택을 나무랄 수만은 없었다는 게
그의 집사 업무의 위대함을 뒷받침할 수 있는 답이 된다.
소설의 중반부부터 등장하는, 달링턴 가의 총무 켄턴 양은
오히려 당찬 현실적인 여성이었다. 당당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으며, 부조리를 상사(?)인 스티븐스에게 언급할 줄 알았고, 잘못된 일에 화를 낼
줄 아는, 우리가 아는 보통의 사람으로 살아왔다. 그녀에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스티븐스 같은 남자를 판단하느라 달링턴 가에 머물며 보낸
시간이다. 내가 보기에 켄턴 양은 자기가 떠나야 할 때를 미룬 것만 같다. 눈치 없는, 혹시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했던,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았던 스티븐스 때문에 말이다. 완벽한 집사의 모습으로 채운 그의 삶을 이해하면서도, 나는 이상하게 켄턴 양이 한 번씩 그를 찌를 때마다 그가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하곤 했다. 감정의 흥분을 드러내고, 우아함을 내던지고 화를 내는, 자기의 자리를 이해하길 바라는 마음을
내비쳐주길 바랐던 거다. 그래서 살살 긁는 듯한 켄턴 양의 시비(?)가 너무 긴장됐다. 스릴 있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 그는 자기의 모든
시간을 하나의 일직선으로 그어놓고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그 선을 그대로 밟고 살아갈 것처럼 벗어나지 않았다. 켄턴 양이 조금의 시간이라도
그를 기다렸던 게 어리석어 보일 정도로 그는 올곧았다. 그런 그에게 개인 시간이 주어질 리 없다. 아니다. 아마 그는 그가 누려야 할 개인적인
시간조차 생각하지 않는 삶에 익숙해진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 켄턴 양이 보내는 신호조차 감지하지 못하고, 세상 누구보다 눈치 없는 남자로 기록된
거겠지.
그의 지나간 시간을 반추하며 듣는 것도 아련했지만,
무엇보다 이 소설의 제목처럼 우리를 붙잡는 건 그의 여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문득문득 던지는 한마디들이었다.
"내 말을 믿어 보시오, 선생. 올라가 보지 않으면 후회하게 도리 거요. 그리고 또 누가
알겠소, 몇 년 더 세월이 지나고 나면 너무 늦었을지도."
노인은 약간 천박하게 껄껄거렸다.
"할 수 있을 때 올라가 보는 게 좋아요." (35페이지)
어쩌면 그의 여정은 지금 어느 길을 올라가 보는 중일지도
모른다. 올라가 본 아래의 풍경에서 자기가 놓치고 살아온 것들을 찾아보는 건지도 모른다. 그게 켄턴 양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자기 삶이
아닌 주인의 삶에 맞춰 흘러간 그의 시간일지도 모르지. 그게 무엇인지 찾는 것 역시나 스티븐스 자신의 의무이자 역할로 남아 있다. 그게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듯, 인생의 황혼 녘에 찾는다는 게 무척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는 기대를 하게 하는 여정이다.
한마디로 정의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소설이다. 동시에 한
남자의 인생에서 우선하며 살아온 시간을 타인이 판단할 수도 없다. 그가 놓치고 살아온 것, 그 자신이 아닌 저택에 속박된 것처럼 지내온 시간이
후회스럽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가 가고자 했던 '위대한 집사'로 향하는 길을, 그는 충분히 밟아왔을 테니까. 다만, '그에게 지금 남은 게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던져졌을 때 나올 대답이 무엇인지는 궁금하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을 종속 관계가 주는 서글픔, 임무에
충실 하느라 바로 위층에 누워있던 아버지의 임종도 보지 못한 안타까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린 여자를 끝까지 붙잡지 못 하는 일들이 그의
내일도 채울 것만 같은 불안함은 뭔지... 일주일의 여행이 끝나고 다시 달링턴 가로 돌아왔을 때의 그의 모습이 어떨지, 이상하게도 나는 자꾸
그의 35년을 '다시보기'하는 느낌이다. 이미 다 알고 있지만, 놓치고 후회하는 것들이지만 다시 선택하는 게 변함없을 거라는 불안함. 그가
보냈던 일주일의 시간은 뭔지 참 모순적이지만, 그런 그의 선택을 공감한다는 게 아이러니다. 우리 삶이 그러하다고 확인이라도 받는 것처럼 말이다.
읽는 내내 '이상하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 소설이었다.
이미 다 알게 되었으니 스티븐스가 다른 선택을 하길 바라면서도, 그가 택한 마지막을 인정했다. 그럴 때마다, 다 안다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하면서도 자꾸만 튀어나오려는 다른 생각들이 충돌했다. 그럴 때마다 슬퍼졌다. 지금도 수없이 많은 고민과 갈등으로 오늘을 버티고 내일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스티븐스가 선택한 결말은 절망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일상 같아서다. 그런데도 그의 선택과 다짐 앞에서 또 한
번의 내일을 기다리는 우리의 모습을 겹쳐본다. 그렇게 살아가는 게 우리이므로, 내일의 어느 순간 지나간 시간을 회상하며 후회하더라도, 현실의
선택에 순응하며 살아왔노라고 말하는 게 우리여서.
하긴, 이제 와서 시간을 거꾸로 돌릴 방법도 없으니까요. 사람이 과거의 가능성에만 매달려 살
수는 없는 겁니다. 지금 가진 것도 그 못지않게 좋다, 아니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감사해야 하는 거죠."
(294페이지)
하긴 그렇다. 언제까지나 뒤만 돌아보며 내 인생이 바랐던 대로 되지 않았다고 자책해 본들
무엇이 나오겠는가?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의 중심축에서 우리의 봉사를 받는 저 위대한 신사들의 손에 운명을 맡길 뿐
다른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내 인생이 택했던 길을 두고 왜 이렇게 했던가 못했던가 끙끙대고 속을 태운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진실되고 가치 있는 일에 작으나마 기여하고자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그리고 누군가 그
야망을 추구하는 데 인생의 많은 부분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결과가 어떻든 그 자체만으로도 긍지와 만족을 느낄 만하다.
(300~301페이지)
며칠 전에 만난 어떤 사람은 "인생 뭐 있겠어요?"라는
말을 여러 번 하면서 지금의 힘든 시간을 위로해주는 듯했다. 잠깐 그의 말에 공감하면서, 그래 인생 뭐 있을까 싶은 마음에 눈길을 돌리며 다른
선택에 시선을 두고 싶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말처럼 인생 뭐 있겠나 싶은 마음으로 살고 싶다가도, 인생 뭐가 더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또 다른 기대를 한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나날은 지금껏 그래왔듯, 어쩔 수 없이 후회와 기대의 양가감정으로 계속 이어질 것 같다. 그
순간들 안에 또 수많은 선택과 갈등, 후회가 자리하겠지만, 어쩌겠나. 우리의 삶이 그러한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