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 당신과 문장 사이를 여행할 때
최갑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하아... 가지고 있던 카메라와 렌즈를 모두 팔아버렸다는 그의 말이 계속 뇌리에 남는다. 오랜 시간 그를 이루고, 지탱해주고, 전부였을지 모를 순간을 채워준 것일 텐데, 그것을 손에서 멀리 떠나보내는 사람의 마음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아서 계속 생각했다. 무엇이 그가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들었는지, 그것 다 내려놓고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겠지. 하지만 계속 생각하다 보니, 어느 순간 그와 비슷한 감정이 나를 채웠던 때를 대입하게 된다. 가끔, 혹은 수시로 찾아오는 순간들. 명확하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런 때를 그가 지금 지나고 있나 보다 싶었다. 물론 내 마음대로 생각한 거다. 그럴 것이다, 라는 추측과 공감의 순간을 끌어내고 싶은 바람 같은 것. 어떤 때는 정말 잔액 0원인 통장까지도 다 내 손으로 정리하고 조용히 묻혀버리고 싶다. 내 흔적을 다 지우고 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쓰레기 하나까지도 다 내 손으로 처리하고 사라지고 싶더라. 그의 손에서 늘 함께했을 카메라를 떠나보내는 마음도 비슷하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잠깐씩 만난 그의 글로 받았던 어떤 느낌들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좀 다르게 다가온다. 그동안 내가 느낀 그의 책이 여행을 떠올리게 했다면, 이번 책은 그의 고통을 풀어놓은 듯한, 지극히 사적인 감정을 들여다보고 싶게 한다. 그는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하지는 않았다. 왜 그랬는지, 지금은 어떠한지, 앞으로는 어떻게 할 것인지. 그런데도 그가 무슨 말인가 계속 하고 싶어 하는 거로 들리는 건 나의 착각일까.

 

자신이 하고 싶은 말들을 그가 가슴 속에 품은 문장들로 대신한다. 어떤 책의 구절, 가수의 목소리가 더해진 가사의 여운, 어느 잡지의 작가 인터뷰에서 남겨진 말, 낯선 곳에 누운 채로 바라본 천장의 무늬와 창문 너머의 풍경들, 누군가 건네는 차 한 잔이 하는 말을 전한다. 낯설지만 안심하게 되는, 알 수 없지만 편해질 수도 있는, 목적지가 없었지만 괜찮을 것 같은 순간들을 위로하는 모든 것이 되는 것 마냥. 그런 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그냥 알아지더라고 말할 수밖에. 그건 어느 순간 내가 느끼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되어버렸으니... 오랜 시간 그의 발길이 닿았던 곳들의 흔적과 시선과 사유가 하나로 뭉쳐 또 하나의 문장을 만든다. 그 시간을 걸어왔으니 할 수 있는 말들. “해결이 된 건 아무것도 없다. 그냥 지나간 것뿐이다. (30페이지)” 그도 알고 나도 아는 것들. 비단 여행이 아니어도 알아지는 것들을 이렇게 듣고 있자면, 또 한 번 듣고 더 잘 알게 되었으니 그만 내려놓아도 되는 마음일진대, 그게 잘되지 않아서 또 마음을 돌린다. 아직은, 아닌 거니까. 해결이 된 것 아무것도 없고 그냥 지나가는 것뿐이지만, 아직은 그걸 인정할 수 없어서 잔물결처럼 발버둥 치게 되는 순간들이 이어질 거라고. 여행 작가인 그에게 진정한 여행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그런 거, 아닌가? 그동안 수없이 계속되었을 그의 여행이 아직 그의 마음속의 것들을 위로해주지 못했기에, 지금 이 순간 오롯이 필요한 건 진짜 여행인 거라고.

 

당신을 사랑하는지 생각해보기 위해 길을 멈추진 않겠지만, 내 인생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가끔 멈추어야 할 것 같아요. 이젠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요. 무언가를 위해서 남은 인생을 바칠 결연한 다짐을 하기보다는 그냥 가끔 맛있는 것이나 먹으며 즐기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랍니다. 그 왜, 앞에서 제프 다이어의 이런 문장을 인용하기도 했잖아요. “마흔이 지나면 온 세상이 오리가 지나간 자리의 물결처럼 되는 거야. 마흔이 지나면 인생은 원래 낭비하기 위해 있는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라는. 뭐 어쨌든, 이젠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요. (168페이지)

 

의 여행 에세이가 아니라 그의 감춰둔 마음을 읽는 것 같은, 그가 잠깐씩 드러내지 않고 적어두었던 일기를 보는 기분이다. 이 책이 이런 느낌일 거라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 그동안 그가 다녔던 곳을 찍고 썼을, 늘 보아왔던, 이번에도 여전할 것 같은 그의 글을 예상했는데, 의외다. 누군가에게 그곳의 이야기를 전하는 게 아니라, 그곳을 떠올리는 자신의 마음 상태에 관해 더 어필하고 싶은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작가의 모습이 달라 보인다. 살짝 투박했던 맛이 있기도 했는데 갑자기 확 말랑해져 버려, 손대면 물컹한 어떤 게 느껴지는 듯한... 그에게 여행이란 익숙하고 편하고 당연한 것처럼 보였다. 보통 사람들이 계획하고 작정하고 많은 준비를 해야만 떠날 수 있는 일이, 그에게는 마음만 먹으면 훌쩍 떠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직업이니까, 그러니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할 수 있을 테니까, 여행이 주는 설렘과 기대가 가득하다면 더 좋은 시간일 테니까. 보통의 삶을 살면서, 하루하루 벅차게 뛰면서 사는 동안 어딘가를 향해 떠남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므로, 누군가에게는 부러움의 시선을 받을 만한 일이다. 직업이 여행하고 글을 쓰는 거라고 하면, 일단 한번은 부러워하고 볼 일이었다. 그런데 조금 더 솔직한 그의 마음을 듣고 나니, 여행이란 단어에 묻어있는 선입견은 버려야 할 듯하다. 설렘이나 부러움, 그게 전부가 아니다. 작가에게도 나에게도, 그곳의 이야기와 풍경들이 글이 되고 사진이 될 수 있지만, 온전한 위로가 되어주지 못한 순간에는 그 의미가 색을 잃는다. 그가 지금 여행을 내려놓은 이유, 그를 위한 여행이 필요한 이유가 아마도 그런 것 때문이 아닐까. 온전히 그를 위로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한 순간에는, 일을 위한 여행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거. 그에게 혼란스러워 보이는 이 순간이 건너가기 위해서는 그 무엇도 아닌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로 대신할 수밖에 없다. 시간, 그것만이 답이 되는 때...

 

자판을 꾹꾹 눌러 문장을 만든다. 이제는 알고 있으니까.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인생이 바뀌는 순간 따위는 오지 않는다는 것을. 회사원에서 프로레슬러로 인생의 방향이 바뀌는 그런 순간은 결코 없다는 것을. 그러니까 반성하자. 비관하지 말고, 오늘은 반성하기 좋은 날씨고 이곳은 반성하기 좋은 위치다. (281페이지)

 

내 옆에 있는 어떤 사람, 그 사람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듣고 있는,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지만 그대로도 좋음을 알아주는 시선으로 봐주기를 바라게 되는 글이다. 기존 그의 글과는 약간 다른, 누군가의 내밀한 속내를 듣는 기분으로 만나면 좋을 책이기도 하다. 사랑이 아프고, 사람이 힘들고, 내일이 불안해도 찾게 되는 글과 문장들이다. 여전히 그의 여행 이야기와 낯선 풍경으로 가득한 사진이 함께하고 있지만, 그 문장들과 사진마저 외로워 보이는 순간들이 많았다. 그전에는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감정을 이제야 포착한 것처럼 다가온다. 추운 계절에 만나서 더 그런 건지, 추운 계절에 추운 일들로 가득한 순간에 만나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그의 쓸쓸하고 무거운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아서, 조금의 온기라도 일으키기를 바라는 간절함 담아 차가운 손으로 양쪽 팔을 문지르는 기분이다. 이 책을 쓴 그도, 그의 글을 읽은 나에게도 그 고독과 외로움, 쓸쓸함, 무거움이 덜어졌기를...

 

“텔레비전은 고장 났고, 욕실에 세수하러 갔을 때는 배관이 심하게 떨면서 전쟁 영화에서처럼 소리가 탕탕 나”더라도, “줄을 설 때는 끼어드는 사람을 막기 위한 곡괭이가 필요”할지라도, “아무것도 읽을 수 없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간신히 눈치로 알 수 있을 뿐이며, 안전하게 길을 건널 수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가 없”을 지라도 여행은 계속되어야 한다. 삶 역시 마찬가지. 되는 일도 하나 없고, 생활은 뒤죽박죽이고, 당신과는 오해만 쌓이더라도 삶은 지속되어야 한다. (324페이지)

 

 

 

 답답해질 때, 어딘가로 떠나고 싶지만 여의치 않을 때.

군가는 공항에 간다고 했다.

이륙하고 착륙하는 비행기를, 출국하고 입국하는 사람들을,

배웅하고 마중하는 사람들이 북적이는 그곳을 보고 온다고 했다.

그러고 나면 며칠을 견딜 수 있다면서.

나하고는 조금 다른 마음이지만,

나는 공항이 아닌 기차역의 플랫홈의 사진을 보면 그런 기분이 든다.

그래서 막상 기차를 탈 일이 있을 때면,

기차에 오르는 그 순간보다 플랫홈에 서서 기차를 기다리는 시간이 더 좋다.

내가 가야 할 방향으로 들어올 기차를 기다리면서,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그 기차에 오르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이 책에도 많은 사진이 함께 하지만,

다 읽고 나서 페이지를 휘리릭 넘기다 보니 이 사진에서 멈춘다.

어딘가로 출발할 누군가의 시선을 떠올려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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