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 - 이동진의 빨간책방 오프닝 에세이
허은실 글.사진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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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눈을 맞추는 시간.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

 

 

어쩔 수 없이, 이 글을 읽으며 <빨간책방>의 문을 여는 이동진의 목소리를 저절로 떠올린다. 들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동진의 얼굴을 본 게 훨씬 더 오래전이지만, 이동진은 귀로 듣는데 제법 잘 어울리는 목소리와 말투를 가졌다. 고요하고 다정한 목소리, 차분한 말투. <빨간책방>의 청취자가 많은 이유 중에 그게 한몫하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나처럼 게으른 독자도 생각나면 챙겨 듣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는 팟캐스트다. 그 방송의 오프닝 에세이를 이렇게 만났다.

 

새 신발을 신었을 때

발가락이나 뒤꿈치에 생긴 물집 때문에 고생한 일,

누구나 있을 겁니다.

 

기타를 처음 배울 땐 어떤가요.

어느 순간 손가락 끝의 껍질이 벗겨지고 굳은살이 박이지요.

 

사람과 사귈 때도 그런 물집과 굳은살의 시간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만나면

당연히 부딪치는 부분이 생기게 마련이고요.

그 마찰 때문에 마음에도 물집이 생기죠.

 

하지만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기타든, 신발이든, 사람이든,

본격적으로 관계를 맺는 건 그런 시간을 통과한 다음이니까요. - 43페이지. 물집과 굳은살

 

에세이인데 시 같다. 짧은 글이 어떤 운율에 맞춰 읊조리는 느낌이 나서 더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다섯 개의 키워드로 나뉜 이야기다. 사이, 마음, 책, 독서, 삶. 각 키워드가 다른 이야기인 것 같지만 결국 그건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일상과 생각을 그대로 연결한 것처럼 자연스럽다. 세상 속 우리 시선, 고민, 바람 같은 게 그대로 묻어있어서 친근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극이 어려워 겪게 되는 일들을 ‘사이’라는 필연적 조건이라 표현하며 이해하게 한다. 관계 맺음과 이어감의 어려움을 굳은살로 만들어야 한다고 에둘러 말한다. 처음부터 익숙해지는 건 없는 법, 찢어지고 물집이 생겨가면서 굳어지는 살이 만드는 게 관계임을 풀어낸다. 환절기가 한 번씩 지날 때마다 설명하기 힘든 그 마음의 출렁임이 부담스러웠는데, 저자는 그걸 계절과의 연애처럼 표현한다. 한 계절이 끝나가고 있음이, 한 번의 연애가 끝나는 것처럼 여기게 한다. 아, 계절의 흐름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구나, 이 계절을 이렇게 흘려보낼 수도 있는 거였구나, 싶은 안도감 같은... 살면서 겪는 많은 감정을 한 가지씩, 살짝, 조용할 목소리로 건네는 속삭임 같다.

 

긴 외출 후에 돌아와 우편함을 열 땐

조금 들뜬 기분이 듭니다.

숫자들만 가득한 공과금 고지서 속에

어쩌면 다른 게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죠.

우표가 붙은 엽서, 누군가의 지문이 묻은 손 편지.

그런 것들 말이지요.

 

마음의 근황을 물어오는 뜻밖의 편지를 기다리는 일.

삶이란 그런 게 아닐까요.

그렇게 혹시나, 어쩌면, 하고 기대를 품고

스팸 메일이나 납세고지서 같은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인지 모릅니다. - 196페이지. 어쩌면 오늘 우리는 편지를

 

 

페이지를 계속 넘기면서 만나는 책 이야기는 ‘그래서 책 이야기를 하는 방송의 문을 여는 것과 너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통해 들여다보는 세상이 낯설지 않아서 더 친근하게 대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독서가 사람 살아가는 일과 다르지 않음을 말하는 저자. 단어와 문장과 페이지에 눈을 맞추며 느끼는 것들. 사람, 시간, 세상, 그리고 더 많은 것. 살면서 여러 가지를 ‘지어가는’ 일이 소소하면서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과정이 되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풀고 있다. 본방송을 듣기 전의 애피타이저 같은, 본방송을 다 듣고 난 후 맛보는 후식 같은 글.

 

(비밀을 하나 말하자면) <빨간책방> 초기를 제외하면, 사실 나는 오프닝 원고를 미리 읽어보지 않는다. 그 글을 처음 대하자마자 눈과 뇌를 거쳐 의미와 리듬을 한꺼번에 굴리면서 입 밖으로 내미는 짧은 순간의 신선한 긴장감에서 출발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녀의 글을 온전히 믿고 순전히 즐긴다. - 이동진

 

이동진의 추천사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저자의 글이, 아직 남은 겨울에 온기를 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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