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존 그린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장소는 나의 장례식장. 나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이 되어 투명인간처럼 그 안의 모습을 보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의 마지막 가는 길에 인사를 하러 찾아올까, 함께 했었던 그 시간 속의 나에 대해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을까, 같은 시간을 즐겼던 그 순간의 나와는 다른 기억으로 저장된 일들은 없을까. 마냥 궁금한 것투성이다. 그리고 그 모든 궁금증의 공통점은 바로 이것이겠지. ‘나’라는 사람을 기억하고 있을까, 나를 어떤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내가 삼십 대에 들어서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소식은 누군가의 탄생 소식과 누군가의 사망 소식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생명의 켜짐과 꺼짐을 동시에 들었던 적도 있다. 대부분은 지인의 아이들이 태어나는 소식, 지인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그 안에서 들려왔던 죽음의 모습도 참 다양했다. 교통사고나 급사, 질병으로 인한 죽음. 그리고 이어지는 장소는 장례식장. 참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가는 장소이다. 그 안에서 내가 평소에 들어왔던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들려온다. 죽은 이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 같은 이야기가 끊임없이 들려올 때도 있었다. 조문객의 입장에서 나는 ‘아, 그런 일들이 있었구나.’ 하는 정도로만 이해하면서 그쳤지만, 그 반대의 입장이 되어보려 하니 조금은 욕심 같은 바람이 인다. ‘나를 알고 있는 많은 이들이 나에 대해서 좋은 것만 기억하고 있었으면…….’ 하는 바람. ‘나’라는 사람의 존재 자체를 기억해주는 것의 바람에서 ‘좋은 사람’이었다는 바람까지 보태고 싶어진다. 그들에게 좋은 사람이란 기억으로 남고 싶은 거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속의 헤이즐과 어거스터스 역시나 나와 비슷한 느낌으로 남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공감을 준다. 더군다나 헤이즐과 거스(어거스터스)는 암이라는 병마와 싸우고 있었고, 언제 자신에게 손짓할지 모를 죽음과 만날 준비도 해야 하는 입장에서 더더욱 죽음이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님을 항상 상기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남겨진 시간, 얼마가 될지 모를 그 시간을 사랑해야만 했다. 그 시간 동안 자신에게 닥칠, 자신이 선택할 일들을 받아내야만 했다. 실험용 의약품으로 생명을 연장하고 산소통에 호흡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헤이즐, 의족으로도 멋진 소년이 되어보는 거스, 한쪽 눈을 잃고서도 유쾌하고 쿨한 남자가 되고 싶었던 아이작까지. 눈물로 보낼 것 같은 시간을 웃음으로, 당연하게 그럴 수도 있는 일로 받아들이려 하는 이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안타까움과 대견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자신에게 시시때때로 다가오는 죽음과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안도의 한숨을 쉬게 만들어준다고 해야 할까. ‘그래, 나는 이렇게 신체의 한 부분을 내어주고서라도 너(죽음)와 싸우고 있어. 반드시 이길 테야!’라고 큰 소리로 말하고 있을 것만 같아서다. 그 순간 생각했다. 이들은 자신의 상황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계속 싸워왔던 그 시간이 곧 멈출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싸우고 있다는 것 자체를, 싸워야만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중이라고.

 

그래서

 

나는 이 책 속에서 느껴지는 슬픔들을 통해 이들의 고통을 함께 만났다.

“고통이란 느껴야만 하는 거거든.” (70페이지)

이미 삶의 끝인 그 죽음을 알고 있는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의 슬픔, 닥치지 않으면 모를 것 같은 그 마지막을 향해가는 슬픔을 이 책의 주인공들과 만나고 있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것 중의 대표주자가 바로 슬픔일 것이다. 헤이즐과 거스에게 똑같이, 갑작스레 찾아왔을 그 슬픔의 깊이를 같이 헤아려보고 있다. 그 슬픔이 유지되는 동안 더 깊은 슬픔과 무너짐을 선사했던 『장엄한 고뇌』의 저자 피터 반 호텐을 만나는 일까지 더해진 것은 이미 이 아이들에게 더 많은 슬픔이 다가올 것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참 친절한 것 같아서 화가 났다. 예고 없이 온다던 그 슬픔을 예고해 주려 했다니.) 한 권의 책을 통해 교감했던 그 시간을 저자의 무책임한 태도로 절망을 느끼게 했으며, 만나고 싶었던 그 마지막 이야기 역시 들을 수 없었다. 작가가 숨겨두고 싶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계획되지 않은 마무리였는지 모를 것들뿐이었다. (이 부분은 직접 이 책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를 읽고 확인하길 바란다.) 그 먼 길을 목숨을 걸고 여행을 감행했던 이들에게 남겨진 것은 더 많은 절망과 차마 얘기할 수 없는 슬픔의 무게였으리라.

 

“아니야. 향수병은 죽음의 부작용이야.” (249페이지)

그 아련한 느낌마저 지워야만 죽음과 멀어질 것을 알기에 때로는 인간이 가지는 어떤 감정들을 잘라내려고까지 한다. 죽음을 향해가는 것을 인정하는 것 같아서 차마 그 감정마저도 버려야 할 것만 같은 이름으로 기억창고에 저장하려 한다. 육체의 아픔이 가져오는 게 너무나도 어마어마해서 단순히 그 병명 이상의 것을 가져오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워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가지는 추억이란 아름다운 이름일 수 있는데, 이제는 그것마저 버려야 할 것이 되었다면 그 병(죽음)이란 것이 얼마나 힘이 센 것인지를.

 

그럼에도

 

“응. 난 『장엄한 고뇌』에 나왔던 그 말을 믿어. ‘잃어가는 그녀의 시력 앞에 떠오르는 해는 너무 밝았다.’ 그게 신이라고 생각해. 떠오르는 해, 그리고 빛이 너무 밝고 그녀는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는 거. 우리가 산 사람을 위로하거나 혹은 괴롭히기 위해서 돌아온다고 믿지는 않지만, 우리가 뭔가가 될 거라고는 생각해.” (178페이지)

이들이 무언가가 되고 싶어 하고, 무언가가 되어 남아주기를 바라는 그 간절함은 아프지 않은 우리와 같았다. 어쩌면 그것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을 살아가는데 이유를 주고, 내일 남겨질 나의 흔적을 새기는 일. 그게 바로 우리가, 이들이 이 순간을 살아가는 목적이자 의무가 아닐까. 그런 면에서 헤이즐과 거스는 충분하게 그 의미를 파악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평균 수명보다 모자란 시간을 끌어안고서 이 세상에 자신들의 존재감을 느끼고 새기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이들의 사랑에 관객으로 동참했다.

슬프기에 아름다웠고, 아름다웠기에 더 아프게 느껴지게 했던 사랑을 보여주는 헤이즐과 거스. 인간의 평균수명보다 짧은 자신들의 숨소리를 듣고 있는, 지금 자신의 몸에 대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 아직은 열여섯, 열일곱. 그 나이의 평범한 십 대보다 병원의 소독약 냄새가 더 친숙한 일상을 살아가는 헤이즐과 거스에게도 다른 이들과 똑같이 사랑은 찾아왔다. 다를 것이 없었다. 평범한 일상에서 만나는 평범한 감정이었다. 몸이 아프다고 해서 다를 것이 없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감정. 그런 일들이 다가온 것뿐이다. 단지 신체적 아픔을 가지고 있기에 또래보다 더 빨리 어른의 마음을 가지게 된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사랑이 내 눈에는 아름다운 회색으로 보였을 뿐이었다. 무채색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들려주고 있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멀지 않은 이별의 순간에, 적어도 서로에게만큼은 그들이 살아갔다는 그 흔적을 새길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듯, 그렇게 사랑을 하는 두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 상처를 이기지 못해 무너지는 누구처럼 되지 않기 위해 그 상처까지 끌어안을 마음으로 헤이즐을, 거스를 사랑 했다. 서로에게 남겨진 흔적이 비록 상처라 할지라도 그 상처를 이기고 내일을 살아갈 것을 알기에 지금 이들이 하는 사랑 역시나 당연한 것으로 보였다. 그냥, 사랑하면 된다. 그게 이들에게 숨 쉬고 있는 오늘을 각인시키는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이들을 나 역시도 당연하게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음의 고저 없이 평범할 것 같은 이야기가 나에게 특별함을 선사했다.

 

며칠 동안 TV와 라디오를 통해 내 눈과 귀에 들려왔던 모든 장면과 소리는 슬픔이었다. 누군가의 모습이 아릿해서 아프고 멜로디가 절절해서 슬픈 노래였다. 어쩌면 그 외의 다른 이유로, 나는 나를 둘러싼 모든 슬픔을 더 깊이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내 맘처럼 흐르지 않고, 예고 없이 찾아오는 슬픔이 헤이즐과 거스에게 찾아왔던 순간들처럼 느껴졌었던 건지도 모르겠다고, 그 공감의 이유를 찾고 있었다. 억지로 그 이유를 찾지 않아도 이들의 이야기는 충분히 공감할만했지만, 나는 그 마지막 장을 덮고서도 밀려오는 여운을 정리할 구실 또 한 번 찾고 있었나 보다. 정말 오랜만에 집중해서 한 권의 책에 빠져드는 순간이기도 했다.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이들의 평범하고 유쾌한 일상이 들려올 때는 웃고 있었고, 내일의 희망이 무너지고 좌절이 찾아올 때는 울고 있었다. 나(우리)에게 흘러가는 일상과 크게 다르지도 않게 그저 누구나 비슷하게 하루하루를 지내는 것과 같아서 안도하는 한편, 언제 높게 일지 모를 파도를 기다리는 불안감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어제는 저런 일, 오늘은 이런 일, 내일은 또 내일의 일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지금 그대로인 것처럼……. 계속해서 이어지고 살아가는 날 중의 하루하루가 쌓여서 가는 시간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처럼 때로는 슬픔과 아픔이, 설렘과 즐거움이 오는 날들일 수도 있겠지. 그래서 늘 슬픔과 아픔을 느끼면서도 웃게 될 희망을 찾아서 살아가는 시간일 테고. 그러한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그 사람을 기억하는 장면들로 남아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나는 흔적을 남기고 싶어요. (322페이지)”

헤이즐과 거스, 두 사람은 이미 넘칠만한 흔적을 남겨주었다.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는 오늘을 다시 보게 하고 시한부로 살아갈 수도 있는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게 한다. 이들이 보여주었던 시간이 슬프고도 아름답게,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 되어 있었으니까. 누군가에게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낼 평범한 일상마저 ‘특별하게’ 살아준 그 시간이 소중하게 여겨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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