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걸리면 뉴스나 예능 프로그램을 본다. TV를 그렇게 자주 보는 편이 아닌데, 드라마는 더더욱 잘 안 보는 편이다. 한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다음 회를 기다리는 그 간절함이 싫어서 안 보기도 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재미를 느끼는 드라마를 못 만났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요즘 완전 꽂혀버린 드라마가 있다. <응답하라 1994>

 

 

 

우연히 3,4회를 보게 되었다. 이거 뭔가? 이 아이들 이름은 왜 이런가? 쓰레기, 칠봉이, 삼천포, 해태, 빙그레.(물론 이 아이들의 이름이 이렇게 나오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뭔가 수상쩍은데 계속 보게 된다. 안 되겠다. 다시 편성표 찾아서 1,2회를 또 잠깐 봤다. 이거, 물건이구나. 한참을 웃기다가 울리기도 한다. ‘네 마음을 다 알고 있어.’ 라고 말하듯이 1994년, 혹은 스무 살 우리들의 이야기를 마구 풀어놓는다. 중독성 강한 드라마다. 공감할 수밖에 없는 요소들이 드라마 곳곳에서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그 속으로 빠져들어 1994년의 나를 본다. 알아듣기 힘든 사투리도 저절로 해석이 될 만큼 몰입하게 된다. 웃기기만 한 게 아니라서 더 마음이 간다. 한참을 웃기다가 기어코 울려버린다. 낯선 곳, 낯선 이들, 낯설기 만한 환경이 만들어내는 것들이 이들에게 정을 만든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만든다. 마음을 나누게 한다.

 

 

 

1994년의 여름. 나는 경기도에 있는 언니 집으로 잠깐 놀러 갔었는데, 북한의 김일성이 죽었다는 뉴스속보를 봤다.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속보가 너무 진지했다. 나는 언니에게 집으로 가는 기차표를 예매해야한다면서 서두르라고 했다. 언니는 황당한 표정으로 질문을 대신하고 있었다. 왜? 김일성이 죽었다잖아! 전쟁이 날지도 몰라, 엄마랑 이산가족 되기 싫단 말이야! 언니는 진짜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렇게 쉽게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서 날씨도 더운데 냉수나 마시라고 했다. 얼마 후 10월, 중간고사가 한참일 때 대형사고가 터졌다고 했다. 다리가 무너졌단다. 어디에서? 성수대교래. 아침 등굣길, 출근길에 웬 날벼락인가 싶은 마음으로 뉴스를 봤던 기억이 난다.

 

 

 

<응답하라 1994>를 끄덕임과 함께 보게 되는 이유는 이런 공감이다. 내 눈으로 보고 들었던 시간들이 고스란히 재연되고 있음이다. 잊혔던 사건들과 음악들이 그 시간으로 나를 불러낸다. 이어폰 한쪽씩 귀에 나누어 끼고, 마치 그때 그 시간이 전부인 것처럼 여겨졌던 때다. 역사박물관에서 볼 수 있을까? 아니, 그런 것은 박물관에 진열되지 않을 듯하다. 나정이가 입고 다니던 멜빵바지. 해태의 긴 허리띠와 부피가 큰 가방, 바닥 청소도 가능하게 만드는 통 큰 바지. 빙그레가 빠져 있는 부활의 음악. 윤진이가 팬심으로 강해져버리는 서태지의 시대. 먼지 풀풀 날리면서도 응원석에 앉아있게 했던 칠봉이의 대학야구. 환호성 속에 열광하던 농구 경기. 검기 손가락을 흔들며 윙크를 날리던 차인표 아저씨의 가죽점퍼. 휴대폰이 보급되기 바로 직전의 호출기. 호출을 확인하거나 음성메시지를 듣기 위해 공중전화 박스에 줄지어선 사람들. 오래 전 한때를 생각나게 하는 김동률의 노래. 그리고 첫사랑.

 

 

 

 

 

 

 

 

 

 

 

삼천포의 이름만 드러난 상태에서 도대체 누가 나정이의 남편인 김재준이 될 것인가 하는 궁금증으로 시선을 놓지 못하게 한다. 그때의 하숙생이 아닌 설마 제3의 인물이 되지는 않겠지? 개인적으로 쓰레기오빠가 나정이 남편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첫사랑은 이루어져야 한다는-순전히 나정이 입장의 첫사랑이지만- 공식이 성립된다는 것을 보고 싶은 간절함에... ^^

 

 

 

11회까지 보면서 많이 웃고 울었다. 그들의, 1994년에 머무른 것이 아닌 흐르는 시간이다. 1994년부터 흘러와 2013년, 마흔의 나이를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이 있다. 스무 살 청춘의 파릇파릇함과 세상을 향해 뛰어든 많은 모습들이 이들을 성장하게 하는 듯하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감정의 흔들림을 경험하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습득하느라 부딪히는 것들. <응답하라 1994> 속에 스무 살의 모습이 있다. 나의 스무 살, 또 다른 이들의 무수히 많은 스무 살이 그 안에 있다. 그 안에서 쓰레기 오빠는 스무 살 청춘들의 멘토 같았다. 그래봤자 몇 년 더 살아온 시간일 뿐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이방인처럼 서울 땅에 모여든 이들에게 먼저 대학생활을 시작하고 서울생활을 시작한 쓰레기 오빠는 선생님 역할처럼 보인다. 많을 것을 물어볼 수 있고, 고민을 나눌 수 있고, 좀 더 나은 방법에 대한 답을 구하고 싶은 대상. 하고 싶은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를 빙그레에게 쓰레기 오빠는 도전이라는 답을 던져주었다. 이것도 하고 안 되면 저것도 하고, 어려운 것도 어렵지 않게 시도하게 만드는 마법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학교만 입학하면 뭐든 다 잘 될 것 같은 기대감으로 스무 살을 맞이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저 연장선으로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을 뿐이다. 휴학하고 말았던 빙그레의 고민, 쓰레기 오빠를 향한 나정이의 마음, 기어이 고백해버린 칠봉이의 도전, 앙숙처럼 티격태격 목을 조르고 졸리다가 연인이 된 윤진이와 삼천포, 의리를 불살라버리겠다는 듯 사투리 속사포로 공격하던 해태. 이들의 그 열정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궁금해질 때마다 저절로 타임슬립하게 된다. 나의 1994년으로.

 

 

 

요즘 아이들이 이 드라마를 볼까 궁금하지만, 역시 본다고 하더라도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들, 공감하지 못하는 내용들 많이 있을 것 같다. 큰 조카가 1996년생이다. 지금 그 아이가 대학입시생이니 곧 만날 스무 살, <응답하라 1994>의 스무 살을 만나게 되는 셈이다. 이십년의 간극을 두고 시작하는 스무 살.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던 그때의 일들이 이 드라마 한편으로 파노라마처럼 내 머릿속을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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