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있지 말아요 - 당신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될 특별한 연애담
정여울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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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뜨거운 반어법의 씨앗이 숨어 있다. 숨이 끊어질 듯 사랑하면서도 ‘잘 있지 말아요’라고 속삭이고, 편지를 쓰고 싶지만 차마 보내기는커녕 완성할 수조차도 없다. 절대 놓아주고 싶지 않지만 ‘그냥 지금 헤어집시다’라고 선언하고, 그녀를 결연하게 떠나보내면서도 자신의 사랑이 무거운 저울추처럼 그녀에게 평생 매달려 있을 거라는 저주를 서슴지 않는다. 사랑하기에 붙잡을 수 없고, 보낼 수 없기에 차라리 놓아버리는 마음의 정체는 무엇일까.” (14페이지 프롤로그 중에서) 

 

그래, 궁금하다. 사랑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모른다고도 할 수 없고, 모르는 것 같으면서도 잘 알게 되는 부분들이 갑자기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러니까, 사랑은 매번 전문가도 되게 만들고 백치도 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잘할 것 같은데도 어렵고, 만만하게 보이다가도 레벨 최상급의 문제 같고, 두려워서 다가가지 못하다가도 한 손만 내밀었을 뿐인데 쉽게 시작되는 것이기도 하고. 울고 웃는 인생사에서 사랑이란 단어가 차지하는 감정적인 비중이 참, 크다. 일상에서 만나는 사랑도 그렇지만 책 속에서 만나는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친구처럼 시작했던 연인은 다시 친구로 돌아가지 못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우연처럼 시작된 츠네오와 조제의 만남은 현실 속 불가능한 조건들 속에서 이런 사랑이 가능한 젊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조제와는 다른 세상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츠네오의 미래는 아픈 마음을 붙잡고서라도 온전하게 조제에게만 향할 수는 없다. 깊은 바닷속 같은 마음으로 살았던 조제의 현실을 츠네오는 감당할 수 없는 부담과 함께 돌아서는 것. 언젠가 츠네오가 기억해 낼 조제의 모습에서 어떤 감정이 피어오를지는 모르겠으나, 한때 불가능해 보이는 사랑을 열정적으로 피웠다는 기억만은 선명할 거라 믿는다. 조제와 함께했던 시간, 그때만큼은 츠네오의 진심으로 조제를 사랑했을 테니.

 

그들은 왜 서로 사랑하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을까. 그들은 왜 함께 살면서도 행복할 수 없을까. 남자들이 상대방의 ‘진실’을 찾으려 할 때, 여자들은 상대방의 ‘이해’를 원한다. 여자들이 ‘미래’를 계획하며 행복의 주문을 걸 때, 남자들은 ‘과거’에 집착하며 그녀들을 유도신문 한다. 여자들이 지금이야말로 최고의 행복한 순간이라 느낄 때, 남자들은 행복을 방해하는 갖가지 장애물을 확인하며 조바심을 느낀다. 이 영화는 감동적인 러브 스토리가 아니라 사랑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불안을 예민하게 포착한다. (31페이지 『클로저』)

 

작업 선수라 자처한 발몽(『위험한 관계』)은 작업 대상 트루벨 부인에게 진심과 열정을 발견하면서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발몽은 트루벨 부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목숨마저 끊어지는 상태였으니까. 시라노(『시라노』)는 연애편지를 대필하면서 사랑을 키워나간다. 항상 당당했던 자신의 큰 코가 사랑을 알게 되니 콤플렉스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크리스티앙의 편지를 대신 써주면서도 사랑하는 록산에게 얼굴을 내놓지 못한다. 하지만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마음은 달라진다. 아쉽게도 너무 오랜 시간 후에 알게 된다는 것, 다시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연애를 시작하기도 전에 사랑에 발목 잡히고, 뭔가가 채워져 사랑에 다가가려 하니 타이밍이 발목을 잡는다.

 

사랑을 거부하는 자에게도 기어코 사랑은 온다.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사랑은 오히려 더욱 드라마틱 할 때가 있다. 지나친 에고 때문에, 자신을 향한 극대화된 사랑 때문에 남을 사랑하는 감성의 회로가 고장 나버린 사람들. (151 『달과 6펜스』)

 

사랑이 수반하는 또 다른 의미는 이별이다. 사랑의 완성이 다양한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을 때 웃을 수 있다. 반면 어떤 식으로든 이별-그게 죽음이라 할지라도-로 갈 길을 택한다는 것은 사랑이 가지는, 피해갈 수 없는 길이다. 한눈에 반한 순수한 사랑 이면에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것만을 확인하고 죽음을 택한 두 젊은이의 사랑(『로미오와 줄리엣』)은 죽음으로 완결되었다. 온몸으로 치러야 했던 속죄의 모습 그대로를 투영한 브리오니(『속죄』)는 치유될 수 없는 긴 이별을 불어온다. 연기에 몰입하다가, 그 주인공으로 착각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임무의 대상인 이 선생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해버린 왕지아즈(「색, 계」)에게 다가온 것 역시 죽음이다. 존재 이유와 목적이 배우처럼 타인을 살아가는 것으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관객들은 오셀로의 비극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진실은 분석이 아니라 진심 어린 믿음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사랑은 흠 없는 완벽이 아니라 흠조차 기꺼이 끌어안는 너른 마음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194페이지 『오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만나야만 하는 이유가 존재한다. 정여울은 이 책을 4개의 카테고리로 나누어 책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마지막 카테고리의 이름은 ‘인연’이다. 앞에서 열정적인 사랑이나 연애 그리고 이별까지 이야기하고서 마지막에 그 인연이라 붙인 이름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한다. 그 이유가 있다. 사랑에 대한 그 많고 많은 정의와 위협들이 한번 휩쓸고 지나갔다. 이 정도만 해도 사랑에 진저리쳐질 것 같다고, 미리 밀어내고 싶은 상황이 올지도 모를 것을 예상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도 괜찮다고.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고 해도, 사랑 그것, 한번 해보라고 말하려는 듯이. 그래서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오만한 남자와 편견을 가진 여자가 결국에 확인하게 되는 것도 사랑이고(『오만과 편견』), 문맹의 치욕과 전범의 누명을 무릅쓰고 지키고자 했던 것 역시 사랑이다(『책 읽어주는 남자』). 사랑을 배운 적도, 그러니 당연히 해본 적도 없는 남자를 품어주던 여자는 마지막까지 그 모습을 지킨다(『제인 에어』). 눈물 한 방울의 기적처럼 얼음조각을 빠지고 부서지게 하면서 알게 해준 사랑(「눈의 여왕」)도 존재한다.

 

사랑이 진정 아름다운 이유는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의 소망을 충족시켜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사랑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 그 사랑을 통해 그들 주변의 세상을 좀 더 환하게 밝혀줄 수 있다는 희망이야말로 사랑을 아름답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빛이다. 소냐의 사랑은 라스콜리니코프의 삶뿐 아니라 죄의 구렁텅이에 빠진 수많은 죄수들의 삶에, 라스콜리니코프로 인해 엄청난 충격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희망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290페이지 『죄와 벌』)

 

 

이들의 이야기가 책에서만 머무르고 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아니다. 적어도 내가 봤을 때는 아니라는 말이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고,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인생들이 주변에 많이 있다. 그러니 책은 책 안에서만 존재하는 이야기로 독자를 만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정여울이 책을 통해서 들려주는 다양한 사랑의 모습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 책을 통해 내가 만난 많은 이야기가 삶과 사랑에 많이 침투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오직 사랑만을 보게 했던 한때를 기억하게 한다. 편견으로 하나의 사랑을 떠나보낸 사람은 엘리자베스가 아닌, 나였다. 록산에게 썼던 시라노의 대필편지는 철없는 어린 시절의 한 장면처럼 떠오른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많은 책과 영화가 공감과 위로의 바람을 불러오고 있다.

이렇게, 우리 삶에서 사랑이란 감정이 불러오는 것은, 너무도 많다. 정여울은 마치 그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거침없이 사랑이란 화두를 던진다. 굳이 콕 집어서 사랑에 관한 비결이나 예외까지 포함해서 구체적으로 풀어놓는다. 우리가 시작하는 사랑이나 연애, 이별, 계속되는 인연과 결혼까지. 사랑이 뿜어내는 그 많은 감정의 의미를 풀어헤친다. 다양하게 다가올 수 있지만, 사랑은 역시 불가능한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끊임없이 시험하게 하고, 우리 삶에 침투해 많은 것들을 변화시킨다. 때로는 풍요로움과 만족감을, 때로는 결핍과 외로움을 선사하기도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이 책에서 소개해준 많은 책 중에는 고전이 많다. 언젠가 우스갯소리로,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로맨스소설은 고전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로맨스소설 속에서 주인공들 이름만 바꾸면 우리 이야기가 된다고 하기도 했다. 우스갯소리로 멈출 이야기는 아니었다. 비록 씁쓸함이 웃음 끝에 달렸지만,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으니까. 이 책을 통해서 오래전 기억을 꺼내게 하는 책들과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준다. 잊고 있었던 것들은 마음이 먼저 기억한다. 순간적으로 피어오르려 했던 그리움이나 외로움은 이들의 사랑이 덮어버린다. 한때의 우리, 불어오는 바람이 스산해질 것을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정여울이 보내는 위로처럼 들리는 이야기다. 바람이 조금, 불어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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