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복서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1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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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현상(사건)을 두고 보는 사람에 따라, 어떤 생각으로 어떤 상황에서 보느냐에 따라 각자가 서술하는 내용이 달라진다. 객관적으로 풀어서 정답이 나오는 수학이 아닌 다음에야 기억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더욱이 그게 서로의 시각차이로 만들어질 수 있는 오해까지 더해진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서로가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오해라면 풀어야 할 것이고, 해결해야 할 문제라면 끝을 봐야 개운해질 것이기에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새롭게 발생하는 문제는 서로 얼굴 보고 쑥스럽거나 민망해서, 혹은 정말 말하기 어려워서 등등 많은 이유로 입 밖으로 말을 꺼낼 수가 없을 수도 있다는 거. 그럴 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편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책 『왕복서간』에서 보여주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편지로 하여금 사실, 혹은 각자가 말하고 싶었던 진실이 드러날 수도 있다. 그것도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편지라는 도구(?)를 이용해 각자가 알고 싶었던 또는 각자가 말하고 싶었던 진실을 드러낸다. 말할 수 없는 시간들을 흘러 보내고, 핑계 삼아 얘기하자면 말할 기회를 놓치고, 조금은 각자의 이기심을 섞어 말하지 않았던 것이 나중에서야 드러나는 것.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고자 열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누가 누구를 단죄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우연처럼 주고받았던 편지에서 알게 된 진실들일 뿐이었다.

모두 세편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십 년 뒤의 졸업문집>, <이십 년 뒤의 숙제>, <십오 년 뒤의 보충수업>. 세 편의 이야기는 각각 십년, 이십년, 십오 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오래전 그때의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내어 들려주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편지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그려지는데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느려도 너무 느리다. 손으로 쓰는 편지로 이야기하고, 인편을 통한 배달을 거쳐 상대의 손에 닿고, 읽고 나면 다시 답장을 쓰는 형식이다. 느려도 너무 느린 이들의 서술 방식에 어쩌면 조금 답답해 보일 수도 있는데, 오히려 그것이 이 책 속의 이야기들의 매력이다. 그만큼 더 솔직하고 진실 되게 보일 수 있는 장점을 담고 있다고 보인다. 일방적으로 자기들의 입장에서 쏟아내는 이야기가 아닌, 한번 말하고 한번 듣고 하는 형식이다. 그러니 저절로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한 번 더 생각한 다음에 답장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그래서일까 답장을 한번 받을 때마다 서로가 미처 몰랐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어떤 사실을 알게 되고, 다르게 생각하고 있던 오해를 풀게 만든다.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사람들의 진심도, 사실은 누군가의 부재가 실종이 아니라는 것(<십 년 뒤의 졸업문집>)도,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누구는 보고 누구는 보지 못했던 상황을 각자가 다르게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이십 년 뒤의 숙제>)도, 친구의 죽음 앞에서 충격으로 잃은 기억이 어디까지 사실로 인지하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순간(<십오 년 뒤의 보충수업>)도. 모든 것은 다 드러내고 풀어내는 순간에야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었다. 편지라는 매개체로 말이다.

자칫 구식으로 보이는 이 편지 주고받는 것이 때로는 가장 진실을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이 되어 서로를 더 가깝게, 무거운 마음은 홀가분하게, 막혀 있던 어떤 것은 뚫어주기도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 많은 괴로운 일들을 그 한마디로, 없던 일로 치부하면 안 돼. 0을 곱한다는 건 그런 게 아닐까?(222페이지) 모든 사실이 드러난 순간 아무 일이 없었던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숫자에 0을 곱하더라도 그 답은 0이 되는 것처럼, 0이 되는 그 순간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도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또 다른 해답을 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긍정적인 생각도 해보게 된다.

서로가 주고받는 편지가 늘어갈 때마다 조금씩 새로운 이야기가 등장했고, 막상 이들이 어느 순간 주고받는 편지가 마무리 될 때쯤에는 사실을 알게 되면 굉장히 슬프고 무거운 마음으로 결말을 볼 것 같았는데 딱히 그러지도 않았다. 편지 속에서 조금씩 드러나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보니 오히려 이들은 밀린 숙제를 끝낸 기분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더라.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알게 되어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이제서라도 사실과 서로의 진심을 알게 된 이들이 새로운 시작을 하는 기분으로 오늘을 살아갈 모습을 떠올려 보니 딱히 나쁘지 않다.

가끔은 통화보다는 문자나 이메일(요즘은 손으로 편지 써서 부치고 하는 것이 드물기에)이 더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어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닐까 생각한다. 말로는 못할 표현도 문자 속의 이모티콘 하나에 표정을 담을 수도 있고, 얼굴 보고 표현 못할 마음 속 이야기도 이메일로는 조금 더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을 보면, 굳이 손으로 쓰는 편지가 아닌 문자나 이메일로 하고 싶은 말이나 마음을 표현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단, 이 책 속의 이야기들처럼 누군가의 죽음이나 오래전 일의 진실을 드러내어 가슴 아픈 시간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면 더 좋겠지.

촛불 아래서 쓰는 편지에는 ‘친애하는’은 물론이고 더 쑥스러운 표현도 쓸 수 있을 것 같아.(186페이지)
이 구절을 보면서 느낄 수 있었던 것 두 가지는 역시나 밤에 쓴 연애편지는 다음날 아침에 한 번 더 읽어보고서는 보낼 수 없다는 것과, 아날로그가 주는 묘미와 악필이더라도 몇 글자 적어 보내는 편지의 맛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하고 한참을 생각했다. 조금은 더 마음속의 진심을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이 책 속의 인물들이 편지로 지난 시간의 죄책감을 해결하듯 고백하는 느낌들은 조금 다른 분위기였지만, 내가 생각했던 ‘편지’라는 단어가 주는 맛은 아마도 설렘이 더 크지 않을까 한다. ‘더 쑥스러운 표현도 쓸 수 있을 것 같은’ 표현의 담대함을 줄 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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