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아이 - 제12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48
이은용 지음, 이고은 그림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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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은행의 문을 두드려보겠다고 마음먹었던 적이 있습니다. 결혼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시절에 혼자 늙어갈 외로움이 두려워 나와 함께 할 아이 한명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에 친구가 꺼낸 단어였습니다. 정자은행. 그 말에 저는 친구에게 물었지요. “내가 바라는 대로 원하는 유전자를 받을 수 있을까? 많이 활발한 O형의 혈액형이었으면 좋겠고, 아이가 키가 컸으면 좋겠고, 나에게 부족한 언어적인 두뇌가 뛰어나 외국어를 잘했으면 좋겠고, 얼굴이 작고 예뻤으면 좋겠고, 엄마와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여자 아이였으면 좋겠고…….” 그 말에 친구가 대답을 해줍니다. “내가 너에게 밀가루 한 봉지를 사줄게. 이걸 반죽해서 네가 원하는 모양대로 인형을 만들어. 그리고 단단하게 굳혀서 평생 데리고 살아!” 그럴 수는 없다는 말이었지요. 아이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듯이, 부모 역시 아이를 골라서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 서로가 서로를 스스로 선택해서 맺어지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인데, 왜 저는 꼭 제 맘에 드는 아이를 선택할 수도 있다는 마음이었을까요.

그런데 아이를 골라서 태어나게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불가능한 일일까요? 이 책 『열세 번째 아이』를 읽어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나 봅니다. 시우의 엄마는 시우를 그렇게 태어나게 했으니까요. 머리는 짙은 갈색으로,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된 키는 187센티미터 정도로, 성격은 판단력이 뛰어난 냉철한 이성을 가진 남자 아이로 시우를 태어나게 했습니다. 2075년 그때는 뭐든 맞춤형으로 만들어낼 수 있나 봅니다. 적재적소에 필요한 로봇부터 자신의 아이까지 말이지요.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게 딱 맞추어 태어난다면, 태어난 아이도 그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부모도 서로가 생각이 엇갈려 싸우거나 대치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겠죠.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가르침으로 살아간다면 평화로운 시간은 계속될 테니까요. 그렇게 행복할 테니까요. 그런데 말이지요. 그게 정말, 행복일까요? 누구에게요?

아마도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2012년과 먼 미래의 2075년은 크게 다르지 않나 봅니다. 감정보다 이성이 우위여야만, 살아갈 수 있고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으로 보입니다. 무엇이든 월등하고 우수해야만 존재 가치가 부여되는 사회,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 사회가 너무 당연하게 여겨져 거기에 따라야만 하는 의무감이 필수인 곳. 감정이 넘쳐흘러서는 안 되며 냉정한 이성을 가진 자가 앞서 가는 것이 너무 익숙한 현실이 되어버린 곳이지요. 이미 그렇게 살아온 어른들이 맞춤형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될 것도 같습니다. 치열한 그 시간들을 견디듯이 살아온 인생 선배의 입장에서 자신의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더 우위에 있기를, 남들보다 더 안전하게 앞서 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너무 당연하게 다가오거든요. 부모들은 자신들이 아이였을 때 가졌던 그 생각들이나 바람들은 어른이 되면서 어느 순간 점차 희석되어지고 거의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자신들이 아이였던 시간들은 기억에서 아예 사라지기도 합니다. 입장이 바뀌니 부모들의 생각만 남아있을 뿐이니까요. 부모의 입장에서 보고 부모의 입장에서만 하는 말들이 옳은 것으로만 판단되는 자리에 있게 되었으니까요. 정녕, 오래전 아이였던 자신들의 그 시간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나요? 아이였던 시간을 건너 뛰어 어른이 된 순간만 간직하고 싶은가요?

아이들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075년의 아이들의 모습이 지금 2012년의 아이들의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요? 제 눈에는 크게 달라 보이지가 않습니다. 지금의 아이들이 부모가 정해준 스케줄대로 하루를 움직이고 미래를 결정짓는 것처럼 2075년의 시우와 시우의 친구들 역시도 부모의 조종으로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보여줍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가야할 길이 정해진 아이들에게 새로운 것이라는 것은, 새로운 개발로 태어나는 로봇들뿐입니다. 그것마저도 계급이 정해져 있습니다.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소유하는 로봇의 레벨이 달라지는 것이지요. 단일 감정의 로봇이냐 아니냐의 차이. 소유한 장난감이 바뀌는 정도의 것으로만 여겨지는 소소한 일상 중의 하나일 뿐인 것이지요. 부모의 직업이 무엇이냐, 사는 동네가 어디냐, 부모가 가진 부의 정도가 어느 정도냐에 따라 어울리는 무리들이 달라지는 지금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너무나도 익숙하게 보아왔던 모습입니다. 현재에서 60여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그 시간에 달라진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감정을 느끼는 로봇이야. 분노와 증오도 할 줄 알고, 기억까지 있어. 언젠가 인간을 위협할지도 몰라.”
인간의 이기심으로 만들어낸 많은 것들의 부작용은 언제 어디서든 튀어나오기 마련입니다. 업그레이드 된 장난감으로 여겼던 감정 로봇들은 인간보다 더 감정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에게 대항하고 있었고, 인간은 로봇들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조종이 불가능해지자 폐기처분 해버립니다. 인간과 로봇의 전쟁 아닌 전쟁이 일어난 것이지요. 서로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겨야만 끝이 나는 전쟁. 하지만 우리가 무엇보다도 더 들여다보아야 할 것은 단순히 로봇과 인간의 대치가 아닌, 왜 그런 상황이 만들어졌는가 하는 것이지요. 맞춤형 아이 1호인 김선 박사가 결코 자랑스러움만 가졌던 것은 아니라는 것과 로봇들의 반란과 시우의 반항으로 보이는 행동. 그 세 가지의 공통점을 제대로 봐야 합니다. 그러한 현상들이 보여주려고 애쓰는 게 무엇인지를요. 본인들의 진심이 담기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들 속에서 꾹꾹 눌러 담았을 어둠을 봐야할 때입니다.

시우 VS 레오? NO! 시우 = 레오!
냉정한 이성으로 채워진 강한 아이를 만들고 싶어서 거기에 맞게 태어난 시우에게 인간의 다양한 감정과 만들어진 기억을 주입시킨 감정 로봇 레오는 너무 달라 보입니다. 감정 따위 필요 없는 것처럼 살아온 시우에게 레오가 드러내는 감정들은 부담이고 거추장스러운 것입니다. 반면 감정 로봇인 레오는 시우에게 좀 더 다가가고 싶은 마음에 자신에게 입력된 감정들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친구가 되고 싶고 가족이 되고 싶은 것이지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시오와 레오가 그렇게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시우와 레오는 너무 닮은 아이들입니다. 엄마에게 조종당하는 인생을 살아왔고 또 그렇게 계속 살아갈 시우와 인간에게 조종당하는 삶을 살아가는 로봇 레오는 너무 닮았거든요. 자신의 삶에 대한 생각과 미래가 주체적인 것이 아닌 정해진 대로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의지와 목소리는 묻혀버리는 인생이 기다리고 있는 삶을 살아가야할 둘은 너무 닮았습니다. “로봇으로 만들어진 레오 =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시우” 그래서 결국 두 아이가 가지는 슬픔과 분노와 끌려가는 미래에 대한 생각은 같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안타깝게도 말이지요. 하지만 긍정적인 것도 같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는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감정 로봇 레오와 이성적인 인간 시우처럼요. 레오가 감정을 나누어주고 느끼게 해주었던 것과 시우가 레오에게 제 발로 찾아간 것은 같은 마음으로 보입니다. 진심이 통한 것이라고. 결국은 그 순간 인간이기에 가장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인간성과 진심을 시우와 레오 그 아이들 스스로가 서로에게 찾아낸 것이라고…….

“누구도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만들 수는 없어. 내가 그런 존재도 될 수 없고. 나는 신도 아니고 그 아이들의 아버지도 아니니까…….”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만들어내고 무엇을 죽이고 있었던 것일까요. 누구를 위해 그렇게 만들어내려 애쓰고 있었던 것일까요. 아이가 바라는, 진짜 행복해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지하면서 계속 해왔던 것일까요. 그 모든 것들을 원하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인지……. 정말 아이에게 가르쳐주고 알려주어야 할 것들을 알고나 있었던 것인지요.
부모, 당신의 기억을 더듬어 보세요. 당신은 완벽한 부모였나요? 혹시 아이를 통한 대리만족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나요? “모두 널 위한 거야.” 이 한마디로 아이를 조종하려 하지는 않았나요? 치열한 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경쟁 사회니까요. 하지만 좀 더 본질적인 것을 보여주려 애쓰고 있었던가요? 아이가 경쟁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남들보다 먼저 앞서 달려가는 것보다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감정들을 먼저 보여주는 것이, 서로가 진심으로 먼저 보듬어주고 지켜봐 주어야할 가족의 일원으로 보는 시선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건 어려운 일일까요? (웃음) 저도 쉬울 거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우리는 인간이기에, 하루하루를 부모와 자식이라는 자리에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보면서 살아가는 이유는 행복해지고 싶어서라는 것을 혹시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닐는지요. 매 순간 서로의 존재감으로,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우리는, 부모는, 아이 인생의 조력자가 되어야지 조종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요. 우리의 아이들은 비교할 대상이 없습니다. 존재 자체가 “0번째” 아이니까요.

《장시우 프로젝트》

성장과정이나 감정상태, 진로가 정해지고 조종되었던 장시우 프로젝트. 더 이상 만들어지고 조종되어지는 인생을 살아가는 시우가 아닌, 시우 자신이 만들어가는 ‘진짜 장시우 프로젝트’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걸맞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이성은 감정을 사랑해야 하고, 감정은 이성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성과 감정은 우리 안에 늘 공존해야 조화를 이루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인간은 감정이 있고, 감동을 할 줄 아는 존재이기에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걱정하지 않아도 돼.”
“조금 늦어진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너처럼 결정이 늦어지는 아이들이 있어. 엄마가 저러는 건 네가 다른 아이들보다 더 탁월하다고 믿기 때문이야.”
“문제가 생겼다는 건 특별한 일은 아니야.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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