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를 만지면 엄정순의 예술 수업
엄정순 지음 / 우리학교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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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저학년 때로 기억한다. 친구 집에서 같이 TV를 보는데, 드라마의 주인공이 빨간 국수를 포크로 둘둘 말아서 먹는 장면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왜 국수를 포크로 말아서 먹는 거지?’하고 중얼거렸는데, 친구가 옆에서 얘기해주더라. ‘저건 국수가 아니라 스파게티야.’ 시골에 살면서 가정 형편이 여유로운 것도 아니고, 형제 많은 집의 아이였던 나에게 스파게티는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이었다. 안 먹어봤어도 어디에서 한 번 정도 봤더라면 어떤 음식인지는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런 경험조차 없던 나에게는 스파게티는 물론이고 그걸 먹는 장면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친구가 스파게티라고 알려준 그 장면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 건, 어린 나이에 느낀 부끄러움이었다. 우리는 친구이고 같은 나이를 살아가고 있는데, 그 아이가 아는 걸 나는 모른다는 게 그저 창피하기만 했다. 크게 부족한 거 없이 사는 친구여서 그랬는지 부모님과 자주 외식을 다녀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 아이와 나의 차이를 상당히 크게 느꼈던 것 같다. 우린 똑같이 앞이 보이는 채로, 비장애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는데 말이다.


시간이 지나고 그때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비장애인으로 살면서 경험하지 못한 일에 따라오는 감정도 혼란스러웠는데, 시각장애인이 느끼는 보이지 않는 세상은 어떤 감정을 불러올지 궁금했다. 아니, 그게 전부는 아닐 거다. 어떤 사물이나 장면이 궁금한데 볼 방법은 없고, 그걸 설명해주는 이가 하는 말을 들으면 주관적인 의견이 섞일 것 같고, 어떻게 해야만 보이는 세상 그대로 그릴 수 있을까. 앞이 보이다가 보이지 않게 된 경우에는 시력을 잃기 전에 경험한 것을 토대로 머릿속에 그릴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처음부터, 아니면 아주 어릴 적부터 거의 보이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다면, 미처 어떤 경험을 하기도 전에 닫힌 시력으로 살아왔다면, 그럼 어떻게 눈앞의 세상을 알 수 있을까. 언제든 보고 싶은 거 보고 하고 싶은 거 하면 되는 일이었다. 검색 한 번에 궁금증은 해결할 수 있는 세상에서, 게으르고 관심이 없어서 보지 못한 것에 간절함이 없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간절함을 잊은 일상의 습관이 부끄러웠다.


불경 열반경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옛날에 어느 왕이 맹인들을 불러 모으고는 코끼리를 만져 보게 했습니다. 그 뒤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물어보았지요. 그러자 이빨을 만져 본 맹인은 코끼리는 큰 무뿌리와 같다고 했고, 귀를 만져 본 맹인은 곡식을 까불 때 쓰는 키와 같다고 했으며, 꼬리를 만져 본 맹인은 노끈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에 왕은 코끼리는 하나이거늘 각자 자기가 아는 것만으로 말한다. 진리도 그와 같으니라,”라고 말했다고 하지요. 이 이야기는 맹인 비하가 아니라, 자기가 아는 세계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어리석음을 이야기합니다. (작가의 말 중에서)


엄정순 작가는 오랫동안 시각 장애 아이들에게 미술 교육, 그중에서도 10년간 코끼리 만지기프로젝트를 지속해왔다.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품고 살아온 작가가 답을 얻는 과정이기도 하다. 먼저 예술가와 아이들이 코끼리에 관해 묻고 답하면서, 코끼리가 얼마나 클지, 코는 얼마나 길지, 코끼리는 무엇을 먹고사는지 상상한다. 코끼리 코가 길다고 하니 수도꼭지에 매달린 호스를, 진공청소기의 긴 호스를 이야기한다. 땅 위에서 사는 동물 중 가장 크다고 하니 6층 건물만큼 크냐고, 아니면 바다 위의 커다란 배와 비슷하냐고 묻는다. 그런 덩치로 어떻게 풀과 과일만 먹고 사는지 궁금해한다. 이렇게 상상하다 보니 궁금증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말로 나누는 코끼리를 상상하는 과정에서 처음 보였던 막연한 두려움은 사라지고 호기심이 남게 된다.


비행기를 타고 버스로 갈아타고, 저마다의 상상으로 그려낸 코끼리를 직접 만나러 태국으로 간다. 그리고 손으로 직접 코끼리를 만져 보고 냄새를 맡아 본다. 그러고 나서야 진짜 코끼리를 느낀다. 코끼리는 코가 길쭉하고, 귀를 둥글둥글하고, 다리는 두껍고 묵직하다고 표현한다. 작가는 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대한 것에 더듬으면서 다가가는 과정, 많은 자극과 경험으로 상상력을 키우고, 드디어 실체와 만나는 경험은 그 상상력과 창의력을 건드리며 예술적 순간을 맞닥뜨리게 된다. 이때 예술가는 아이가 경험한 것을 떠올리고 그 느낌을 표현하도록 북돋운다. 이 책에서도 담겼지만, 아이들은 직접 만난 코끼리를 자기만의 모습으로 만들어낸다. 그렇게 완성된 작품을 보고 있으면, 코끼리가 정말 다양한 모습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상상력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이렇게 직접 부딪히는 과정으로 시각 장애 아이들은 낯선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자극을 통해 한 걸음 나아가는 성장을 보여준다. 비장애인인 우리에게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뒤집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장애로 인해 어떤 기능이 결여되었더라도, 그 결여는 새로운 신체 경험을 가능하게 하고, 스스로 차이를 창조하는 주체적 과정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작가는 말한다. 보이지 않아도 완성해낼 수 있는 예술의 세계가 얼마나 놀라운지 보여주면서, 신체적 장애가 인간의 성장을 방해할 수 없는 경험을 선사한다. 감동스럽다는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인생의 커다란 가르침을 얻는 기분으로 읽게 되는 책이다.


이 책 안에 시각 장애 아이들이 코끼리를 직접 만지고 느낀 그대로 만든 작품이 담겨 있다. 그 작품을 찍어서 첨부할까 하다가 말았다. 직접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작품을 마주하고 또 다른 감동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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