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시민교양 프로그램으로 어린이 독서 지도에 관련 수업을 열었기에 신청했다. 사실 어린이 독서 지도에 관심이 있어서 신청한 건 아니다. 정말 단순하게, 어차피 독서에 관한 이야기는 같은 거 아닌가 생각했다. 어쩌면, 이 수업을 듣고 나면 책을 조금 더 잘, 재밌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지금 절반이 조금 넘어가는 회차의 수업을 듣고 있는데, 솔직히 어린이 독서에 관한 내용이 성인 독서와 많이 다르긴 하다. 그런데도 수업은 재미가 있다. 뭐랄까, 마치 책 읽기의 시작을 배우는 느낌? 이렇게 책을 읽고, 이런 방식으로 책을 고르고, 아이가 한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골라주는 책의 수준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등등. 책을 읽는 습관과 의미는 이렇게 시작해야 하는 거라고 배우는 것만 같다. 실제로 수강생의 대부분은 아이에게 책을 잘 읽히고 싶다는 엄마들인만큼, 아이에게 책을 읽히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선생님이 가끔 숙제도 내어주시는데, 이번에는 아동시를 하나씩 골라오라고 하셨다. ‘주로 어린이를 독자로 예상하고 어린이의 정서를 읊은 시라는 동시 말고, 어린이가 지은 시를 찾아보고 마음에 드는 시를 한 편씩 가져오라고. 검색해서 찾아보니, 어린이가 쓴 시를 엮은 책이 생각보다 많았고, 그 중 몇 편을 읽어보다가 혼자 웃고 뭉클해지고 그랬다. , 이래서 아이의 시선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되겠구나 하는 깨달음? 아이들도 말을 안 했을 뿐이지 자기 안에 참 많은 생각을 깊게 하고 있구나 싶은 기특함 같은 거 말이다. 읽다가 페이지 끝을 접어놓은 몇 편이 있어서 소개해주고 싶다.


<용돈>

오늘 용돈 받는 날이다.

엄마께 말해야 하지만

엄마가 힘들게 일하시는데

용돈 달라고 하기가

미안해서

말 못 하고 있다. (돌머리가 부럽다, 50페이지)


이 시를 읽고 있는데, 갑자기 가슴이 울컥하면서, 며칠 전에 만나고 온 조카가 생각이 났다. 고등학교 1학년, 아침 7시쯤 등교하면, 오후 4시쯤 하교하고, 집에 와서 잠깐 간식을 먹고 후다닥 학원으로 간다. 집에 일찍 오면 10, 시험기간이면 스터디카페에서 공부하고 온다고 새벽 2시쯤 들어오더라. 아이들이 커갈수록 부모와 대면할 시간이 부족해진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제부와 맥주를 한잔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아이들 얼굴 볼 시간이 정말 없다는 걸 알겠다고 말한다. 유일하게 아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제부가 아침 출근길에 큰 아이를 같이 태우고 등교하는 때다. 그래봤자 10분 정도, 아들에게 요즘 별일이 없는지 묻거나 하는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데, 그때 아들이 엄마 몰래 용돈 좀 달라고 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다나. 매달 받는 용돈은 정해져 있고, 용돈이 없으면 엄마 카드 쓰기도 하는데, 엄마 카드 쓸 때마다 알림 문자가 가니, 마냥 엄마 카드만 쓸 수도 없고, 자기 용돈 모자란 부분을 아빠에게 sos를 치는 거다. 아빠는 엄마 몰래 아들과 공모하는 그 순간이 행복하다고 했다. 그게 뭐라고, 소박한 그 일상의 단면들을 기쁘고 즐겁게 여기며 살아가는 제부가 귀여웠다. 이 시의 주인공도, 엄마에게 용돈 달라고 하지 못한 말을 아빠에게 슬쩍 건네고 있지는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둘만의 비밀과 추억으로 그 시간을 그렸다면 즐거운 하루가 될 것 같아서.


<불평등 약속>

엄마께서 동생한테 약속하게 했다.

놀이터 가지 말고, 매일 공부하라고.

강화도 조약이 따로 없다. (돌머리가 부럽다, 76페이지)


이렇게 귀여운 조약의 비유가 또 있을까? 아마 엄마는 놀이터에 가지 말고 매일 공부하라는 게, 한 순간도 놀지 말고 공부만 하라고 말한 건 아닐 테다. 놀이터에만 가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기만 하니, 적당히 놀고 공부하라는 의미일 것 같다. 하지만 놀다 보면 어디 적당히가 있을쏘냐. 우리 어릴 적 생각하면 바로 답이 나온다. 해가 저물어갈 때까지, 손에 흙 묻히고 놀던 시절이 저절로 떠오르는 건 나만의 기억이 아니겠지? ^^ 엄마가 나를 찾아 동네로 나와 저녁 먹으라고 할 때까지 놀았다. 도대체 그 시간까지 뭘 하고 놀았을까. 지금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그때의 장면들은, 바가지 머리를 하고 짧아진 바지를 입고 찍은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 머물러 있다. 불평등 조약이라도 힘을 휘두르며 자식에게 큰소리를 치는 엄마의 모습이 그리운 순간이 올 것을 이 아이들은 알았을까? 이제는 아픈 몸을 자식에게 의지하며, 삶의 많은 부분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상을 감당하는 부모의 모습이 보기 힘들다는 것을. 때로는 강화도 조약 같은 불평등 조약을 자식에 부모에게 휘두르는 순간도 있다는 것을. 그러니 이 녀석들아, 엄마가 강요하는 약속의 의미를 한번쯤은 깊이 생각해주렴.


<구구단 외우기>

7단을 외우면 8단을 잊어버린다.

8단을 외우면 7단을 잊어버린다. (그럼 전 언제 놀아요, 52페이지)


, 요즘에 이 마음을 너무 공감해서 탈이다. 다 늙어서 공부하려니, 이 쉬운 것도 너무 어렵다. 이틀 만에 끝내고 시험 봤다는 사람도 많던데, 그게 내 얘기는 아니더라. 어제 배운 거 오늘 까먹고, 오늘 배운 거 내일 또 까먹을 텐데, 이거 계속 해야 하나 고민도 들고, 막 그런 나날이었다. 이 시를 보고 동병상련(?) , 그런 마음이어서 눈물이 날 뻔했다. 그래도 아이야, 구구단은 외워두는 게, 앞으로 해야 할 많은 공부를 생각하면, 구구단은 꼭 외워야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이 늙은 아줌마도 지금 구구단 같은 거 외워야 하는데, 구구단보다 조금 더 어렵더라. 같이, 잘 외워보자. ?!


<나머지 공부>

나머지 공부하다가

선생님이 화내면

나는 가만 있다.

마음속으로는

나도 선생님을

혼내고 싶다.

그래도 참는다.

한글 다 알 때까지는

꾹 참을 거다. (그럼 전 언제 놀아요, 35페이지)


귀여워서 혼났다. 이 아이는 선생님이 화를 내는 동안 복화술로 엄청 화를 냈을지도 모르겠다. ㅎㅎ 내가 한글만 다 알게 되면, 그때만 되면, 가만히 안 있을 거야. 뭐 이랬을까? 혼나면서 얼마나 서러웠으면 선생님을 혼내고 싶다고 생각했을까.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이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다. 어른이 되어도 이런 순간이 찾아오고, 비슷한 감정을 갖게 된다. 얼마 전에 컴퓨터를 배우러 학원에 다녔다. 선생님 두 분이 수업을 나누어 들어오셨는데, 한분이 유독 말을 빠르게 해서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컴퓨터 전공을 하셨고, 거의 30년이 넘는 세월을 이쪽에서 뼈를 묻으신 분이, 내가 허덕이며 따라가는 이 공부가 얼마나 쉬워 보였을까. ‘이 정도면 다 알지?’ 하는 분위기로 100미터 달리기하듯 수업을 하시는데, 정말 괴로웠다. 매번 하나하나 질문을 하자니, 다른 수강생들이 수업 듣는데 피해가 될까 봐, 다 몰라도 그때마다 질문하거나 확인하지 못했다. 속으로 엄청 욕했다. 전문가인 당신과 백지 상태인 내가 어떻게 같을 수가 있냐! 이 수업만 끝나면 다시는 이 근처도 지나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일주일 후부터 다른 수업 들으러 그 학원에 간다. 수업 스케줄도 그 선생님 것밖에 없어서, 다른 선택이 없다. ㅠㅠ 다 배우고, 시험 볼 때까지는 꾹 참을 거다.


<날 위해서가 아니라>

부모님들이 혼낼 때

들어가는 말.

널 위해서야.”

그 뒤에

너가 이러면 부모가 욕먹어.”

날 위해서가 아니라

남한테 욕먹기 싫을 뿐이면서. (그럼 전 언제 놀아요, 127페이지)


초등학교 5학년 아이가 쓴 시다. 예전의 초등학교 5학년은 마냥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초등학교 5학년은 많이 다르더라. 이 시의 주인공이 이렇게 썼다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많은 것을 보고 듣고 하면서 ‘-라떼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그렇다는 거다. 30년이 넘는 시간의 차이를 두고 차이를 느끼는 게 당연하지만, 신체적 정신적 나이가 다르다는 것을 확연하게 느끼는 요즘이다. 얼마 전에 조카랑 자기 엄마랑 싸우던 모습이 이 시로 옮겨왔나 싶을 정도로 똑같아서 놀랐다. 공부와 진학 문제로 다투면서, 조카가 자기 엄마에게 그랬다. 자기가 좋은 학교 가는 게, 엄마가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려고 그러는 거라고. 부모는 입버릇처럼 다 너를 위해서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게 사실이니까. 다만, 그게 아이와 생각이 다를 때 문제가 된다. 아이가 자신을 위해서라고 생각할 수 없으니까. , 답을 찾기도 어렵고, 서로를 할퀴며 상처가 범벅된 마음을 추스리는 것도 어렵더라. 그런데 이 시를 보고 있자니, 때로 우리는 이렇게 시를 써서라도 서로의 마음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의 생각과 부모의 생각이 다를 때, 계속 말로 주고받으면서 더 악화된 경우를 많이 봤다. 가끔은 한 박자 쉬어가듯, 감정과 생각을 정리해서 글로 주고받는 방법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로는 전화통화 하는 것보다, 이메일이나 문자로 전하는 마음이 더 차분해질 때가 있는 걸 보면, 아주 틀린 방법은 아닐 거로 믿는다.


초등학교에서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자연과 사계절을 벗 삼아 만든 공간에서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그려진다. 돌머리가 부럽다시집을 읽다 보면, 마냥 도시의 풍경은 아닐 거라는 배경이 보인다. 아이들에게 자연을 사랑하고, 시를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이었다. 이 시간과 경험이 훗날 아이들이 어떤 어른으로 성장하게 만들지 저절로 그려진다. 때로는 사투리를, 때로는 틀린 맞춤법이 그대로 담겨 있기도 하다. 그 자연스러움이 아이들의 솔직한 마음을 더 진하게 전달하는 듯하다. 애써 꾸미거나 포장하지 않아도 그대로 보이는 말들 속에서 마음을 읽었다. 그 나이, 그 시간이 아니면 결코 알 수 없는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어서, 읽는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예쁘고 기특해서, 귀엽고 솔직해서, 이렇게 깊게 생각하는 아이들의 마음이 독자의 가슴에 그대로 담기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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