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미술관 - 이유리의 그림 속 권력 이야기
이유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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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그림으로 보는 차별의 역사 같았다. 저자는 권력자의 의도로 달라지는 그림을 이야기한다. 흑인, 장애인, 여성 등 그림 속에 존재하는 이들은 그저 그림을 돋보이게 하는 도구에 불과했다. 어떤 혐오의 시선까지 더해지면 이들의 존재는 상당히 깎아내려 진다.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어떤 소품을 그려 넣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그림의 의미를 저자는 권력으로 달라지는 시선에 집중한다. 누구에게나 똑같을 수 없는 그림의 해석, 누군가는 불편하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어느 시대이라도 이런 시선을 만드는 이가 있다는 게 가슴 아플 뿐이다.


저자는 이 책으로 말한다. 그림을 예술로만 볼 수 없다면 그림이 말하는 시대의 모습까지 같이 보게 한다. 얼핏 권력을 담은 그림 때문에 오해나 편견을 심어줄 수도 있을 듯하지만, 반대의 해석도 가능하다. 예술가들이 바라는, 예술 그 자체에 힘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림에 담긴 많은 대상이 어떻게 비치고 있는지 듣고 있노라면, 예술이 이래도 되는가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어린이, 노인, 성소수자, 인종, 질병 등을 중심으로 사회가 정한 정상에서 벗어난 차별을 그려 넣는다. 하지만 이들은 이 차별을 그대로 감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해방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기에, 작품 속 소품에 머물지 않게 되기까지의 험난한 시간을 저자는 풀어낸다. 4부의 구성으로, 각 장에서는 주제에 맞는 그림 이야기가 펼쳐진다. 기울어진 그림을 부수는 존재들, 그림 속 소품이기를 거부한 여성들, 뒤틀린 권력에 균열을 내는 그림들, 선전 도구에 저항하는 예술가들이다.


흑인의 아름다움을 담아내려는 걸까 싶었던 그림마저 백인을 돋보이게 하려고 흑인을 배치했다는 게 놀라웠다. 한 인간의 존재가 장치로 사용되었고, 그를 비판하며 흑인의 자리를 찾아주려고 <올랭피아의 하녀>를 그렸다는 화가 바스키아. 얼핏 패러디처럼 보이지만, 웃음이 아니라 진지한 생각을 남겨주는 느낌에 단순한 그림이 아니구나 싶었다. 열 마디 말보다 한 장의 그림으로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다 담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질병이 벌을 받는 거라고 여긴 시대의 잘못된 시선을 말하는 <병든 아이>는 질병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같이 풀어가야 할 문제임을 시사한다. 질병은 단순히 육체의 아픔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꼬집어야 하는 일이었다. <가니페데스의 납치>로 미켈란젤로가 자기의 성정체성을 커버하려고 했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다. 영화 <데니쉬 걸>로 알게 된 게르다 베게너의 성정체성을 관한 이야기와 연결해서 보게 되는데, 드러내지 못해서 커버해야만 했던 시대의 배경을 듣는다. 우리가 말하는 정상성은 도대체 무엇이 기준이 되는지 알 수 없음을 다시 생각한다.


여성 혐오의 시대는 끝나지 않은 듯하다. 오늘날에 일어나는 많은 문제도 그렇지만, 그림 속 시대의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도 그러하다. 자신이 태어난 곳인 자궁을 혐오하는 역사가 이렇게 깊었다니. 월경하는 여성을 열등하게 여겼으며, 여성에게는 그저 아이를 낳고 키우는 어머니상을 강요하기만 한다. 그림 속 여성은 어머니의 역할을 하지 않거나 너무 과하게 해서 욕을 먹는다. 여성에게 모성 신화를 강요하면서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중심 잡기를 강요에 더한다. 시쳇말로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고 하는 것인가 따지고 싶지만, 모성을 강요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이기에 모성의 정도를 가지고 말하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지는 않다. 여전히 계속되는, 여성의 가사노동에 관한 <네덜란드 집의 내부> 등의 그림도 사회적인 문제를 비판한다.


많은 혐오로 사회 밖으로 밀려나는 사람들이 있다. 때로 우리가 강요하는 이미지는 그 나이와 위치에 맞는 역할이다. 아이도 노인도, 전염병이나 개발로 쫓겨나는 사람들은 많은 불평등에 노출된 거다. 여성의 늙음을 죄악이라 여겼던 <피에타>와 달리, <농암 이현보의 초상>은 나이 들어가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그렸다. 평소에 생각하던 게 이 그림이 녹아든 것 같아서 설명을 듣는데 가슴이 뭉클해졌다. 늘어가는 눈가의 주름이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확인받은 것만 같다. 이런 것을 보면 그림이 권력에 기울어지거나 혐오에 쓰이는 도구뿐만 아니라,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고 애쓰는 장치로도 쓰일 수 있다는 걸 알겠다.


좀 더 분야를 넓혀서 얘기하는 게 마지막 4장이다. 권력자들이 그림을 이용해 자기의 독재나 권력 누리는 걸 정당화하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사회의 부조리함을 꼬집기도 한 화가가 있는 걸 보면, 예술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노력한 이들이 분명 있다는 거다. 저자가 그림으로 풀어내고 해석하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다양한 시선으로 예술을 봐야 하는 이유가 이런 거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베네치아에서 열린 코뿔소 전시회>는 이미 제목에서 그림의 의도가 들린다. 관광지에서 보게 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학대당하는 동물들의 고통을 그대로 담았다.


권력자들의 시선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는 예술 세계. 저자는 많은 그림과 마음을 담은 설명으로 그 기울기를 뒤집는다. 그림에 표현되기까지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묵인되었고, 인간이 평등하게 살아가야 함에도 불평등은 늘 있었다는 것. 그림에 담아내지 못한, 그림에 담긴 아름다움이 사실은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림을 제대로 보기를 말한다. 제대로는 기존의 설명이나 소개 같은 거 대신, 우리의 시선을 약간 비틀리게 하면서 그림 속 이야기를 담아내게 한다. 많은 것을 보고 의문을 가지는 것은 삶의 방향이 되어야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왔던 것에 대해 의문을 갖고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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