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도망자의 고백
야쿠마루 가쿠 지음, 이정민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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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의 가족이 가해자를 만나고 싶어 한다면,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드는가. 복수라도 하려는 게 아닐까 싶은 두려움이 생길지도, 법이 아니라 감정의 벌을 내리고 싶은지도 모른다. 소중한 존재를 잃었는데, 아무리 법이 형량으로 죄인을 다스린다고 해도 마음의 분노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어쩌겠나, 법이 해줄 수 없다면 직접 나서서 이 감정을 다스리는 수밖에.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렇게 행동한다면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 이 분노의 감정을 억누를 방법이 없지만 참아야 한다는 것을. 피해자는 가해자가 법의 심판을 받는 것으로 모든 일을 잊을 수 없다는 괴로움에 시달려야 한다.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도대체 피해자가 당한 고통의 크기는 얼마만큼일까 계산도 되지 않는다. 사건은 끝났고 가해자는 벌을 받았다고 하는데, 왜 가해자는 여전히 가해자로 살아가야 하는가.


쇼타는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같이 일하는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과하게 마셨던 그 날, 집으로 돌아간 쇼타는 여자 친구 아야키의 문자를 보고 갈등한다. 지금 만나러 오지 않으면 끝이라는 말에 만나러 가야 하는지, 술을 마셨는데 어떻게 가야 할지. 고민하던 쇼타는 직접 운전하면서 아야키를 만나러 가다가 사고가 난다. 누군가를 친 것 같은데, 분명 사람인 것 같은데, 선뜻 인정할 수가 없었다. 설마 아니겠지. 사람이 아니라 개나 고양이겠지. 내려서 살펴볼 법도 하건만, 무서웠던 쇼타는 그냥 지나간다.


그날의 일은 쇼타의 인생에 무엇을 남겼을까. 완전범죄는 없었다. 쇼타는 그 사건을 뉴스로 확인하면서 개나 고양이를 친 게 아니라 사람이 죽었다는 걸 알게 됐다. 410개월의 형을 살게 된 쇼타뿐만 아니라, 쇼타의 가족 모두가 사람들의 입에 올랐다. 쇼타가 형기를 다 마치고 나왔을 때, 더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을 직시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혼했고, 사건이 일어나기 전 결혼을 앞둔 누나는 파혼했으며, 유능한 교육학자였던 아버지의 명예는 바닥에 떨어졌다. 가족 모두가 정상의 삶을 유지할 수 없었다. 쇼타 역시 전과자로 쉽게 취직할 수 없었다. 예전 친구를 만나도 거리를 느낄 뿐이었다. 그나마 그의 곁에서 다시 친구가 되어준 아야카만이 유일한 인간미를 보여줬다. 그리고 그의 옆 옆집으로 이사 온 이상한(?) 노인이 그의 시야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가해자가 있다면 피해자도 있기 마련이다. 쇼타가 낸 사고로 80대 여인이 죽었다. 그 여인에게도 가족은 있었고, 그 가족에게도 상실의 슬픔은 있었다. 슬픔을 잊기 위해, 허무하게 죽은 아내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남편은 가해자를 쫓는다.


죽은 여인의 남편이 가해자를 쫓는다는 설정에, 법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분노의 감정을 인간이 보여주려는구나 싶었다.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법이 내가 생각하는 그대로 결론 내주지 않는다는 것을. 나에게 고통을 준 이의 목숨을 끊어놓고 싶은데, 법리적인 판단은 다르지 않았던가. 그러니 내가 만족할 수 없는 판결을 마주했다면,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마무리 짓고 싶은 게 인간의 마음이지. 내가 예상했던 흐름은 이런 거였다. 피해자의 남편이 가해자를 쫓아 그만의 방식으로 복수하겠다는 거 말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피해자의 남편이 가해자를 쫓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가해자를 쫓던 그 마음은 나의 예상을 한참 빗나갔다. 그렇게 빗나간 예상은 오히려 인간다운 면을 강조한 듯 보였다. 언제 어떤 상황을 만났느냐에 따라 우리는 가해자도 되고 피해자도 된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느 자리에 서 있을 수도 있다는 거다. 한때는 가해자였던 이가 다른 상황에서는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야쿠마루 가쿠의 전작에서 보지 못한 다른 시선이었다. 작가의 작품 최초로 가해자의 눈으로 사건을 보는 이야기라고 했다. 뺑소니 사건의 가해자가 사건을 일으켰을 때부터 사건 이후의 이야기까지 가해자 쇼타의 시선으로 흐른다. 그는 분명 벌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고, 법의 심판으로 벌을 달게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가 받은 형량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게 소설 속 이야기로만 남을 수 있을까? 운전해본 적은 없지만, 운전하는 사람이라면 사고의 위험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누구나 가해자 쇼타의 입장이 될 수 있고, 피해자와 유가족의 입장이 될 수 있다. 내가 일으킨 사고에서 내가 쇼타와 다른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나? 같은 상황에 닥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쇼타와 내가 다를 거라고 말할 수 없었다. 사람을 죽이는 사고를 일으켰지만, 남은 인생 웃으면서 살아가고 싶은 바람을 품으면 안 되는 걸까?


법이 접근할 수 없는 마음속 죄의식을 묻는 이 소설에 많이 공감했다. 법이 정한 형기를 마쳤다고 가해자의 책임을 다한 것인지, 마음속에 남은 죄의식이 남은 삶을 어떻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가해자로도 피해자로도 마주할 수 있는 이 사건에서, 우리가 무게를 두어야 할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 찾고 싶어질 것이다. 현대사회의 많은 문제까지 함께 다뤄져서 많은 생각을 남겨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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