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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아이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 내로라 / 2021년 5월
평점 :
누구나 겪는 상실이라고 여겼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고, 인간이 살아가면서 당연하게 겪는 그런 일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닥치는 일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안다. 받아들여야지. 감당해야지. 그런데도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마음의 문제가 그러하다. 머리로는, 내 의지로 바꿀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겠는데, 마음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겁기만 하다. 감당하지 못해서 마음의 병이 되기도 한다. 단순히 물건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을 나눈 존재에게 더욱 그러하리라.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가 있다. 데이비드와 조세핀은 따스한 봄날에 결혼하고 세 번의 봄을 맞이했을 때 아들을 낳았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다고 믿던 그때, 20개월을 함께한 아들이 부부의 곁을 떠났다. 사랑하는 아이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부모가 있더냐. 조세핀은 세상의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일상이 무너진다. 마음이 무너진 것은 물론이고, 몸도 마음을 따라간다. 그런 아내를 보는 남편의 마음은 오죽할까. 어떻게 해야 아내가 상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전전긍긍한다. 조세핀이 자리에 누워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날을 이어갈 무렵,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아내에게만 들리는 아이의 울음소리, 저 멀리서 파도 소리처럼 엄마를 찾는 소리. 아내는 밤마다 간절한 그 울음소리를 쫓아 바닷가를 배회한다. 아이를 찾아서,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걷다가 들어온다.
“따라갔는데, 따라잡을 수가 없는 거 있죠. 최선을 다했는데, 그렇게 서둘렀는데, 아주 약간만 더 가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정말 그랬는데. 놓치고 말았어요. 그래서 돌아왔어요. 그렇지만 나, 최선을 다했어요. 정말로요. 그리고… 아, 너무 힘이 드네요.” (꿈의 아이 33페이지)
남편이라고 아내의 마음을 모를까. 갑자기 떠난 아이가 마치 품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데, 남편이라고 그 상실감을 모를 바 아닌데, 아내에게만 들리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두렵기만 하다. 어디에서 오는 소리일까 궁금해하는 것도 사치였다. 소리를 따라 바닷가를 헤매는 아내를 찾아서 데려오는 일상이 이어진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태풍이 불어도 아내는 바닷가로 나가는 걸 멈추지 않는다. 전문의에게 상담을 받아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아내를 지켜보라고, 곧 정상으로 돌아올 거라는 말로 남편을 위로하지만 답답하기만 하다. 남편이 할 일은 아내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지켜주는 것뿐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아내는 밤뿐만 아니라 낮에도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바닷가를 헤매기 시작하고, 마을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고, 남편은 더욱더 아내에게 집중한다.
어쩌면 나 혼자서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은 그만큼 강력하니까. 분명한 것은, 어떤 상황에도 아내를 어디론가 보내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가련한 아내의 행동을 제재하는 것은,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의 손이 유일해야 했다. (49페이지)
아내가 절망에 빠지고 상실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 남편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겪어본 사람만이 아는 그 마음, 옆에서 아무리 위로하고 일상으로 돌아오길 바라도, 정작 당사자가 감당하는 슬픔의 무게는 아무도 모른다. 똑같은 경험을 하기 전까지 누구도 섣불리 이해한다고, 다 안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조세핀과 데이비드에게는 아이를 잃었다는 공통의 슬픔이 있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마음이 같을 거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내는 남편과 다르다고 여긴다. 낳고 젖을 먹이고 품 안에서 기른 마음을 따라올 수는 없다고 말이다. 그 말도 맞지만, 슬픔에 빠진 아내를 보고만 있어야 하는 남편의 마음도 편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아내의 치료를 위해 다그치거나 억압하지 않는다. 바닷가를 헤매는 아내가 다치지 않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지켜보고 손잡아줄 뿐이다. 사랑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상대의 슬픔을 인정해주고 지켜보는 일이 이렇게 대단해 보이다니...
너무 간절해서, 아내를 낫게 해주고픈 남편의 바람이 신에게 닿기라도 한 걸까. 기적처럼 이 부부에게 꿈의 아이가 찾아온다. 그들의 아이가 떠난 자리에 딱 들어맞는 것처럼 채워질, 이 부부에게 다시 봄날의 따스함을 안겨줄 아이가 찾아온 거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기적이 아니고서는 이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여기고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들의 간절함을 이미 보았기 때문에 함부로 말할 수가 없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이 부부가 미쳤다고, 태풍이 불어도 바닷가를 헤매던 것으로 보였을지 몰라도, 이 부부에게는 오랜만에 다시 찾은 봄날이었다. 어쩌면 신이 남편의 사랑에 감동하여 이 부부를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 기적이 이런 사람들에게 찾아오지 않으면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무엇이 되든 일단 따스함을 불어넣어 주자고, 설령 이게 하룻밤의 꿈으로 끝날지라도 지금은 이 기적을 누리게 해주자고 누가 빌기라도 한 것만 같다.
이야기니까, 상상하면 그대로 써질 소설이니까 가능했다고 단정할 수도 있다. <빨간 머리 앤>으로 유명한 루시 몽고메리가 경험한 상실을 바탕으로 써진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저자의 성장과 닿아 있는 이야기로 보이기도 한다. 어렸을 적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의 재혼으로 외조부에게 맡겨진 채로 자랐던 몽고메리. 이 정도 환경이면 외로웠을 거로 여기기 쉽지만, 정작 저자는 특유의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이야기의 세계에 빠졌다.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캐릭터는 저자의 친구가 되었고, 그런 친구와 대화는 한 편의 이야기가 되어 고아 아이를 유명한 작가로 만들었다. 물론 그 작가가 되기까지도 간단하진 않았지만, 저자에게 기적이 찾아온 거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빨간 머리 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놀랄지도 모르지만, 앤의 성장을 우리가 응원하고 지켜봤듯이, 조세핀과 데이비드 부부의 기쁨과 상실과 슬픔의 과정이 고스란히 들려오는 것 또한 많이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다. 깊은 고통을 마주하고 지내온 이들이 마지막에 만난 기적 같은 날은 잊을 수 없을 듯하다. 우리가 살면서 바라는, 힘들 때마다 찾아와주길 바라는 순간이었으니까 말이다.
꿈같은 이야기에 빠져있는 시간은 짧았다. 알다시피, ‘월간 내로라’ 시리즈는 짧은 이야기다. 하지만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짧은 이야기에 반해 여운에 빠져있는 시간은 길다는 것. 충분히 즐기고 여유 있게 곱씹어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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