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모네이드 할머니
현이랑 지음 / 황금가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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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만 있으면! 그래, 다른 거 다 없어도 돈만 있다면 노후 생활이 편해질 거로 생각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하다. 나이 먹고 돈 없으면 누가 나에게 밥을 줄까. 다른 가족이 있거나 자식이 있다면 그들과 비비며 늙어갈 수도 있겠지만, 자식도 없다면 혼자 늙어가다가 죽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말이다. 돈도 있고 자식도 있지만, 가족과 함께 살아갈 수 없는 때도 있더라. 치매라는 병 앞에서 선뜻 가족이니까 함께 살아야 한다는 말은 꺼내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여긴 모든 게 다 가짜다. 바다처럼 보이려고 바다 색으로 칠한 수영장, 잠금장치도 없는 가짜 방문, 마을도 아니면서 마을이라고 붙인 가짜 이름, 여기 사는 사람인 척하지만 돈 받고 일하는 어른들, 어른들의 가짜 웃음, 아이들의 가짜 친한 척, 이젠 아기가 되어 버린 가짜 할아버지 할머니들……. (45페이지)


도란 마을은 치매 환자들을 위한 병원이다. 하지만 누구도 병원이라고 느낄 수 없게 구성되었다. 넓은 집을 분양받듯 한 채씩 가지고 있고 그 안에서 각자 생활한다. 식사 시간이나 공동 운동 시간에는 함께 모이기도 하지만, 원한다면 사생활을 유지하며 살 수도 있다. 아프면 진료해주고, 배고프면 밥 주고, 필요한 게 있으면 마을 안 마트에서 산다. 카페도 있고, 미용실도 있다.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마을 안에서 해결된다. 의료진과 직원들은 자기 자리에 맞는 유니폼을 입고 있다. 의사 가운이나 간호사 복장은 아니다. 마치 마을의 주민처럼, 어느 레스토랑의 직원처럼 입고 있는 직원들. 치매에 걸린 노인들은 자기 세계에 빠져 살면서도 쉽게 공포에 떨고 놀라기도 한다. 환자들의 안정을 위해 만들어진 이 구성이 생각해보면 나쁘지 않아 보인다. 단 한 사람만 빼고.


평화로운 곳이다. 고요하고 큰 소리 한번 난 적이 없다. 그런 곳에서 갑자기 들려온 비명은 까칠한 할머니 탐정을 탄생시킨다. 최고급 리조트 같은 도란 마을의 쓰레기장에서 비닐봉지에 싸인 아기 시체가 발견된다. 도란 마을의 원래 땅 주인이었고 현재 도란 마을 입주자인 까칠한 레모네이드 할머니는 이 사건에 관심이 많다. 도란 마을의 의사 아들인 꼬마는 할머니와 팀이 되어 이 사건을 파헤친다. 사람도 싫고 아이도 싫어하는 할머니가 어떻게 꼬마와 팀을 이루었을까 싶지만, 원하는 게 같으면 원수도 아군이 되는 법. 할머니는 이 무료한 곳에서 사건을 추적하며 즐거움을 찾고, 꼬마는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간으로 가슴에 있는 상처를 하나씩 치유해나간다.


여기가 그렇다. 이게 일상이다. 깨끗이 씻겨 놓은 노인들은 아기 같이 예쁘지만 그 똥은 아기의 것이 아니다. 아무리 자주 씻겨 준다 해도 죽음과 고통의 냄새는 가시지 않는다. 여기 일하는 모두가 말한다. 나는 이 병에 걸린다면 상태가 악화되기 전에 죽겠노라고. 아무리 좋은 환경에 있어도 치매는 치매다. 누구도 도망가지 못한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니다. 뇌는 날로 쪼그라들고, 몸은 날이 갈수록 약해진다. 더 괴로운 건 내가 누군지도 모르게 되는 것이다. 그땐 흘릴 눈물조차 없어진다. 왜 슬퍼해야 하는지 모르니까. (114페이지)


비닐봉지에 버려진 아기 시체를 시작으로 사건이 발생하고, 경찰까지 불렀지만 별일 없이 묻혀버린 상황을 보니 이곳이 참 수상하긴 수상하다. 치매 노인을 위한 완벽한 천국 같은데, 이 수상쩍은 분위기는 뭐란 말인가. 이 찝찝함을 털어내기 위해서라도 할머니와 꼬마의 활약이 필요했다. 모든 것을 기억하기 어려운 할머니는 수첩에 수사(?) 상황을 꼬박꼬박 적는다. 꼬마는 눈치 빠르게 할머니의 조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사건의 진실에 다가갈수록 구린내가 풀풀 나는데...


이야기를 들을수록 왜 이렇게 씁쓸해지는지 모르겠다. 처음 했던 생각은, 돈만 있으면 노후가 그나마 덜 불행할 거로 여겼다. 틀리지 않는다. 노후가 그나마 행복하려면 돈을 필수 조건이다. 그런데 돈이 아무리 많아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여기서 새삼 느낀다. 최고 시설에 최고급 대우를 받는 곳이지만, 외로웠다. 가족이 있다고 외롭지 않은 것도 아니고, 가족이 없다고 외로운 것도 아니다. 레모네이드 할머니처럼 가족이 없어도 자기 삶을 잘 마무리하고 떠나는 사람도 많을 테지. 하지만 많은 이가 외로움을 느낄 겨를도 없이 치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또 그 틈을 이용해 부정부패와 비리를 저지르는 이들이 활개를 친다.


각자의 사정을 숨긴 채로 도란 마을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 외로움과 슬픔은 더 깊어진다. 가정 폭력에 시달리다 겨우 회복되려는 모자, 가난이 죄는 아닐진대 가난하다는 이유로 무시와 차별을 당하는 청년, 돈에 가려진 가족의 모습을 유지하며 불륜을 저지르는 부부, 아무리 못된 짓을 하고 다녀도 공부만 잘하면 된다는 텅 빈 머리의 부모들, 당연하게 권력을 휘두르며 마약을 즐기고 마약 밀매까지 하는 권력자들, 이 사건의 시작이 되었던 아기 시체 유기까지. 세상에서 들려오는 온갖 나쁜 짓이 도란 마을 안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도대체 도란 마을은 어떤 곳인가?


남들에겐 흔한 비극이라도 자기가 당하면 서러워지는 게 인간이지.” (59페이지)


챕터마다 화자가 바뀐다. 그들의 속내를 듣는 일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내일을 살기 위한 오늘의 몸부림 같아서 말이다. 기쁨과 희망보다 감춰진 고통을 듣는 일이 쉽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할머니의 까칠한 말투나 세상 관조하는 읊조림은 사이다 같기도 하고 은근한 바람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해서 많은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못된 사람들에게 벌을 주고, 애쓰고 노력하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할머니의 삶의 태도가 몸부림치는 것 같다. 우리는 각자의 나이에 각자의 자리에서 할 일이 있다. 그런데도 그 상황과 나이를 넘어서서 해야만 하는 일도 있는 듯하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감춰진 거짓을 드러낼 줄 아는 용기. 꼬마가 어쩔 수 없이 할머니 옆에 있었던 것이지만, 그 시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고, 누군가는 감추려고 애썼던 범죄를 훌륭하게 들춰냈으니까. 어쩌면 어른이 더 배워야 할 태도가 아니었나 싶다.


심장 쫄깃해지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추리소설이었다. 도란 마을을 떠올리면 영화 <트루먼 쇼>가 생각나기도 했지만, 결말이 다르니 비교할 수는 없다. 다만, 본인은 모르는 본인의 삶이 다른 이들이 지켜보는 삶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내 일상을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데, 정작 나는 내 인생을 잘 모르는 시간. 끔찍했다. 그게 치매 노인의 시선이고 시간일 거로 생각하니 더없이 우울해졌다. 우리 자신도 정확히 모르는 우리의 최후가 어떤 모습일지 두렵기도 하고. 한 달에 1천만 원씩 내는 요양 시설에 가지는 못할 것 같고, 그러니 더 건강하게 살아보려 애쓰는 수밖에. 그래도 레모네이드 할머니처럼 살고 싶기는 하다. 멋지고 심플하게, 당당하게. 그 마지막 모습마저 레모네이드 할머니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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