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되는 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3
최진영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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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또 울겠지만 절대 같은 이유로 울지는 않을 것이다. (170페이지)


1년 후에 도착할 편지를 쓰는 일. 유치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이벤트를 모른 척할 수가 없는 건, 아마도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있었다는 거 아닐까. 말하고 싶지만 선뜻 꺼내지 못 하는 말, 누구에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담아두기만 했던 말, 계속 담아두자니 가슴이 답답해서 터질 것 같은 순간에, 마치 기적처럼 나타난 편지쓰기라니. 우연히 들어간 카페에서 마주한 편지라는 대화는 태희의 현재에 과거의 기억을 불러와 오늘의 서러움과 모욕감을 새긴다. 이 감정의 이름을 몰라서 당황하고 대응하지 못했던 순간을 후회한다. 이 편지는 어디로 가서 누구에게 닿을 것인가. 태희의 오늘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소설 속 두 명의 태희는 각자의 시간을 산다. 삼십 대의 태희는 현재의 모든 것을 미루며 사는 중이다. 엉망인 집안을 치우는 일, 친구의 생일을 그냥 지나친 일, 애인과 헤어지는 일 등을 미루던 중에 할머니의 죽음을 듣는다. 어린 시절 태희의 모든 시간을 지켜봤던 할머니의 죽음은 태희에게 남다를 것 같은데, 지금 태희는 할머니의 애도마저 미루고 있다. 어떤 것도 현재의 태희에게 와 닿지 못한다. 그녀는 지금 꺾이는 중이고 부러지기 직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머니에 대한 애도까지 미룰 수 있는 걸까 싶지만, 태희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아서 그녀의 미루기를 마냥 욕할 수가 없다. 이도 저도 못 하고, 가슴은 터질 것처럼 부풀어가는 이때 태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 태희를 보면서 십 대의 태희를 동시에 본다.


삼십 대의 태희가 우연히 들어간 카페에서 쓴 편지는 십 대의 태희에게 보내진다. 그 편지를 누구에게 보낼까 하는 고민은 그 편지를 쓸까 말까 하는 것만큼이나 심각한 문제였다. 그녀 말마따나 지금 쓰게 될 이 편지를 1년 뒤에 받아도 괜찮은 사람, 그때까지 사이가 틀어지지도 않고, 나의 부끄러움도 보여줄 수 있는, 이 이벤트를 비밀로 해줄 사람이 누구일까 싶었을 때 가장 안정적인 사람이 과거의 태희였던 것. 무슨 판타지 소설의 한 장면처럼, 삼십 대의 태희가 쓴 편지는 십 대의 태희에게 배달된다.


십 대의 태희를 보여준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궁금했다. 현재를 살아가기에도 팍팍한데, 아직 철부지로 있을 십 대의 태희를 소환하는 이유를 찾아야 했다. 태희의 엄마와 아빠는 이혼했다. 부모님은 각자의 삶을 위해 떠났고, 태희는 외할머니 집으로 보내졌다. 어린 시절은 상처뿐이었다고 여겼다. 부모에게 버려진 느낌이었고, 이모와 같이 방을 쓰면서 어린 태희에게도 필요했을 사생활은 없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사실 상처뿐이라고 여기던 그 시절은 태희도 모르게 성장하던 시간이었을 거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에는 담임의 차 위에 똥을 쌌고, 오래된 친구와는 이별했다. 어린아이들을 성추행하면서 권위를 내세우기만 했던 담임에게 보여준 태희의 행동은 무엇이었을까. 엄마와 아빠가 말하지 않은 진실에 상처받고, 어떤 일은 겪고 나서야 배우는 감정이었다. 부끄러움과 자책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느꼈던 건 모욕감이라고. 이런 감정은 또 어떻게 알게 되는 걸까. 누구인지 모르지만 태희와 이름이 같은 이에게 배달된 한 통의 편지에서 그녀는 버리고 싶은 마음을 담아 답장을 쓴다. 누구에게 온 건지도 모른 채로 읽은 편지, 제대로 배달될지도 모를 편지를 쓰는 마음. 아마 그때의 태희는 그 편지를 쓰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현재의 태희가 과거의 태희에게 쓸 수밖에 없던 것처럼 말이다.


내가 어렸을 때 그들은 젊었다. 어린 내게 젊음은 완벽한 어른이었다. 지금 내게 젊음은 얼어붙은 호수 같은 것. 언제 갈라지고 깨질지 알 수 없는 것. 미끄러지지 않으면 얼어붙는다. 서로에게 적당한 속도로 다가갈 수도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다. 아래의 것이 위로 올라오면 죽고 위의 것이 아래로 떨어지면 죽는다. 내게 어울리는 곳이 아래인지 위인지 판단할 수 없고 빙판에서 우리는 영원할 수 없다. 어릴 적 내게 빙판은 신나게 놀 수 있는 곳이었다. 어른들은 빙판을 조심하라고 했지만 나는 빙판을 위험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언 것은 녹는다. 인식은 변한다. 시간은 쌓인다. (190페이지)


아마도 오늘의 태희는 어린 시절의 나와 화해하고 싶었던 것일까. 내가 지금 여기에 왜 있는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지금 이 모습이 맞는지 묻고 싶고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할머니를 애도하기 위해서라도, 불평등과 부조리로 웅크리고 있던 회사 생활을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애인의 배신에 끝을 내기 위해서라도 한번은 거쳐야만 했던 통과의례 같은 느낌이다. 그 시절 이해할 수 없던 어른들의 행동에 상처받은 아이는 자라서 그때의 어른과 다르지 않은 어른이 된 것만 같다.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중얼거리면서, 남들에게 드러내지 못한 마음을 꾹 눌러 담으면서, 해야 할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생각하면서. 이런 생각 하면서 자라는 태희의 모습에 섬뜩해지는 건 어른이 된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아서다. 어릴 때 바라봤던 어른들의 모습이, 어른이 된 우리의 모습이라는 건 절망적이었다. 내가 어른이 되면 다를 거라는, 어린 내가 감당해야 할 문제는 어른이 되면 저절로 해결된다고 믿었던 것. 과연 그럴까. 마치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는 알 것 같다는 뒤늦은 후회를 반복하는 것만 같다.


나는 왜 여기에 있지. (중략) 난데없는 곳에 뚝 떨어진 나는 기억을 잃은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며 여기가 어디지, 난 왜 여기 있지, 원래 난 어디에 있었더라, 당황하는 것이다. 나는 늘 어딘가로 가는 도중 같았고, 어디에도 나만의 자리는 없는 것 같았다. (124페이지)


지나고 나니 기억도 나지 않는 상처들 때문에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린 태희가 내린 결론도 그런 것이었다. 이 모든 게 어른이 되면 해결될 일이라고 믿고 그 시간은 건너왔을 테지. 하지만 그게 정답은 아니었다는 게 함정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었고, 그러니 어른이 된다는 게 해결은 아니라는 것. 시간은 흐르고 우리가 물리적인 나이를 먹어가는 건 당연한 흐름이겠지만, 어린 우리가 어른이 된다는 것 또한 당연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가 놓친 것은 어른이 아니라 가 되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른 태희가 어린 태희에게 보낸 편지로, 어린 태희가 어른 태희에게 보낸 편지로 달라질 두 사람의 모습이 기대되는 건, 서로의 진심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부끄럽지만 진심을 이야기할 수 있어서, 그 부끄러움을 당당하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어서 괜찮아질 오늘을 만나고 싶어서다. 아무것도 아닐 것 같은 편지로, 어른 태희는 엄마의 집에 찾아갈 수 있는, 돌아가신 할머니를 애도할 수 있는 마음을 얻었지 않았나.


기꺼이 외면하고 싶었던 상처와 마주하는 일은 쉽지 않다. 동시에 그 상처와 마주해야만 오늘의 나를 치유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어느 심리 치료에서 들었던 말이 생각난다. 모든 일의 시작점을 찾아서,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현재의 상처가 치유될 거라고. 근원을 찾아야 한다는 말로 이해했다.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가 과거의 나에게서 시작되었으니, 우리의 어린 시절에서 이어져 온 삶을 되짚어볼 필요도 있다는 것을. 그 문제가 무엇이든, 상처가 무엇이든, 펼쳐놓고 다시 읽고 화해하면서 진정한 나로 나아갈 수 있다고 어린 태희가, 어른 태희가 말하는 것만 같다. 우리는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되는 과정을 걷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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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21-04-29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되는 과정을 걷는다라... 정말 가슴에 와닿는 표현이에요. 인생의 끝자락에 섰을 때 너무 부끄럽지 않은 내가 되어 있어야 할 텐데 말이죠... ㅠㅠ

구단씨 2021-05-04 14:00   좋아요 1 | URL
제가 다 알 수는 없지만, 결국 그거 같아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간이 내가 되어가는 그 과정의 일부이지 않을까 하고요.
그 끝에는 내가 있겠죠. 물론 지금도 내가 있긴 하지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