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의 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2
하야미 가즈마사 지음, 박승후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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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나를 단단히 옭아매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돌파구를 찾는다. 벗어나야지, 이 불행을 끝내고 행복을 찾아야지 하고 말이다. 발버둥 치고, 애쓰고, 노력한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내 능력 밖의 상황으로만 몰릴 때, 애써 달려왔는데도 늘 제자리의 고통만 느끼게 될 때,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더는 나아질 것 없는 내일이 기대되지도 않고, 내 존재감이 누구에게도 기쁨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절망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 절망의 끝에서 느끼게 되는 건 어떤 다짐이다. 더는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 내 존재 이유를 더는 찾을 수 없다는 생각에 모든 것을 체념한다. 단단하게 얽힌 인생의 거미줄에서 한 줄기 희망이라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읽게 되는 이 소설에서, 내 의지와 다른 방향으로 가는 삶의 모습을 본다.


다나카 유키노. 방화로 살인을 저질렀다고 붙잡힌 그녀는 순순히 자기 죄를 인정한다. 옛 애인의 집에 불을 지른 그녀는 그의 아내와 쌍둥이 딸, 심지어 배 속의 아이까지 죽게 했다. 그녀의 죄는 사형이라는 결과를 낳았고, 이제 사형 집행일만 기다리고 있다. 선고받았을 때 그녀가 한 유일한 말은 태어나서 죄송하다는 거였다. 순간 숨이 막혔다. 자기 의지로 태어난 사람이 어디 있던가? 태어날 수 있는 환경과 부모를 내가 정할 수 있지 않다는 건 너무 잘 안다. 그런데도 살면서 나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이유로 내 인생을 평가받는다. 유키노에게도 그녀가 원하지 않고 바꿀 수 없는 인생의 배경이 있다. 그녀의 어머니는 호스티스 출신으로 열일곱 살에 그녀를 낳았다. 사생아로 자라면서 새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했고, 학창시절의 범죄 이력도 있다. 현재 그녀의 죄가 과거에서부터 이어져 온, 혹자가 말하길 너무 당연하게 만들어질 결과였음을 시사한다. 언론과 주변에서 말하는 그녀의 삶이 이럴진대, 그녀의 죄가 경감될 리 없다.


자기 스스로 사형을 원한다며 재판의 결과를 바꾸려고 애쓰지 않은 범죄자의 마음이 무엇일까 궁금했다. 잘못을 저질렀고 그 잘못의 대가를 치른다는 건 당연한데, 그 죄가 꼭 사형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아니, 그녀가 반드시 사형받아야 할 정도의 큰 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녀가 왜 그런 죄를 저질러야 했는지 가장 진실한 모습을 찾아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언론에서 언급하는 그녀의 풍문이 아니라, 가장 옆에서 가장 실제 모습을 본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녀의 성장과 환경을 설명해주어야 하는 거 아니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어떤 일의 과정 정도는 들어주어도 좋은 거 아니냐고 묻고 싶어지는 순간이 많았다. 많은 이가 모르고 또 많은 이가 아는 그녀의 진짜 모습을 파헤치는 과정이 그녀의 사형 선고 이후로 계속 들려온다.


딱히 변명도 반성도 하지 않은 채로 교도소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유키노의 이야기를 하는 이들이 있었다. 장마다 유키노를 아는 이들의 조용한 진술이 시작된다. 재판 방청이 취미인 여자는 재판장에서 본 유키노의 표정과 눈빛을 말한다. 유키노의 언니 유코는 그녀와의 성장 시절의 모습을 보여준다. 중학교 동창 리코는 유키노의 과거에 가장 중요한 순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기억에서 꺼낸다. 유키노의 엄마를 알았던 산부인과 의사는 유키노의 탄생을 말했으며, 옛 애인이자 방화사건 가족의 유일한 생존자인 게이스케의 친구 사토시가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유키노를 이야기한다. 카더라 통신으로 입방아에 오르내리던 루머 말고, 진짜 유키노를 겪으면서 알게 된 그녀의 진짜 모습을 말한다. 그들의 그런 진심 어린 호소와 진실 알리기에도 유키노의 사형은 변함없었다. 그녀 스스로 삶을 이어나가고 싶은 의지가 없던 것이다. 아마 이 사건이 아니었어도 그녀는 삶을 놓을 이유를 계속 찾아다녔을 것만 같다. 왜 살아야 하는지, 얼마나 간절히 살고 싶은지 내 마음의 의지를 찾지 못한다면, 누구에게나 오는 내일이 더는 기쁘지 않다면 얼마나 슬플까. 여러 사람이 말하는 그녀의 진실로도 바꿀 수 없는 그녀의 마음은 얼마나 깊은 상처로 채워져 있을까.


나는 그녀의 삶을 더 늘려야 했다. 분명히 이 순간에도 친구들은 유키노를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편지에 적힌 글에 아무 각오도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순간을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하면 누구에게도 미래는 없다. (366페이지)


그녀는 유죄일까 무죄일까. 소설은 그녀가 죄를 인정하고 사형 선고를 받아들이면서 시작되지만, 독자가 지켜보게 되는 건 한 여자의 인생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파괴되어 가는지, 오늘날 사형제도가 필요한지 아닌지 묻게 한다. 그녀의 삶을 이렇게까지 만든 모든 순간의 선택을 오롯이 그녀 책임이지만, 그때 그 순간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든 상황에 대해서는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까. 누구나 다 비슷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삶의 구석구석에서 배치된 요소들은 너무 다양하고 중요한 것들이어서 인생이라는 큰 그림을 다르게 그린다. 무엇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안타까웠던 것은 왜 그녀의 곁에서 그녀의 삶을 소중히 여기게 해주는 이가 없었느냐는 거다. 비록 부모도 환경도 선택할 수 없이 태어나는 게 인간의 숙명이라지만, 적어도 태어나는 순간이 성장하는 시간보다 전혀 중요하지 않을 정도로 만들어주는 이가 있다면 다행일 것 같은데. 왜 이런 다행은 간절히 바라는 이에게 찾아오지 않는 건지.


이야기 자체도 충분히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우리가 무심코 지나칠 수 없는 묵직한 주제까지 더해줘서 더 집중해서 읽게 된다. 사건의 전개가 순차적으로 진행되면서 점점 겉에서 안으로, 유키노라는 사람의 실체에 다가간다. 그녀가 정말 범죄를 저질렀는지, 그들이 하나씩 털어놓지 못한 순간들을 고백하면서, 결국은 이 사건의 끝에 있는 사형제도가 필요한지에 대한 질문을 쉬지 않는다. 이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범죄이지만 가해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는, 그래도 죄를 묻지 않을 수 없는 이 상황의 딜레마와 사회에 관해 같이 고민하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누군가의 조금씩 왜곡한 진실에, 더는 살고 싶지 않은 누군가의 간절함이 더해진 사건의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지 듣고 나면 충격이다. 혹시나 하는 독자의 바람을 무시하듯 벗어난 결말에 이 소설의 무게감은 최고조에 달한다. 이 결말의 여운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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