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어하우스
베스 올리리 지음, 문은실 옮김 / 살림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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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대학가 근처에는 원룸이나 소형 아파트, 기숙사가 학생들을 주거를 흡수하지만, 내가 어렸을 적의 대학가는 흔히 자취방이라고 부르는 옛날식 원룸이거나 응답하라 시리즈 같은 하숙이 대세였다. 집에서 가까운 대학에 다녔기에 이런 방식의 독립은 경험하지 못한 때였다. 다행인지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는 친구 덕에 기숙사 구경도 해 보고, 그 친구가 고학년이 되었을 때는 학교 앞에서 하숙했기에 하숙집을 경험해보기도 했다. 독방에 세면시설이 있었고, 식사만 다른 하숙생들과 같이했다. 복도식 아파트의 축소판처럼 각각의 하숙방이 쭉 있는데, 나중에는 옆방 남자 선배와 친해지기도 하고, 다른 학부의 친구를 알게 되기도 했다. 어린 마음에 가졌던, 로맨스 소설에서나 등장하는 설정이 현실로 이어질 법도 하건만, 소설은 소설일 뿐 현실은 각자의 학교생활 충실히 하고 졸업과 동시에 인사도 없이 떠나가는 잠깐의 식구(?)였다.

 

이상하다. 이런 로맨틱한 상상은 그 이후로도 가끔 떠오르곤 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언젠가...' 그래, 언젠가 나에게도 옆집의 남자와 부딪힐 사건이 벌어질지 몰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괜히 화내거나 성질내지 말고 성격 좋은 여자 이미지를 심어주겠다는 엉뚱한 계획까지 세웠다니까.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영화나 드라마 같은 일은 정말로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가능하다는 사실. 간혹 현실에서 일어나는 이런 일들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복사해서 붙인 것처럼 말하기도 하는, '정말 드라마에서나 보던 일이 일어났더라고요!' ? 그거잖아. 그래서인지 이야기는 그냥 이야기로 머무는 거지... 라고 다짐하지만, 또 상상하고 기대하고 설레고 싶어지네, ~!

 

베스 올리리의 셰어하우스는 독자의 이런 간질간질한 마음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소설이다. '내 로맨스가 아니면 관심 없다! 소설이나 영화의 로맨스는 사양한다!'라고 외치는 독자에게 은근히 스며들기 좋은 이야기로, 사랑이 시작될 때의 설렘과 두근거림, 사랑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와 오해들, 좀 더 성숙한 사랑을 위해 이들이 어떻게 걸어가고 있는지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게다가 현실에 맞는 상황들과 약간은 소설 같은 설정에, 인생의 단짠단짠을 그대로 확인하는 시간이었다는. 사는 게 뭐 있나, 이렇게 힘들다가도 인생 전화위복이 되는 거, 그렇게 행복에 한발 다가서려고 애쓰면서 사는 게 사는 거지.

 

애인과 헤어진 티피는 같이 살던 애인의 집에서 나와야 할 상황이지만, 그녀가 가진 돈은 부족했고, 살 곳은 필요했다. 그러다가 발견한 셰어하우스 광고. 집주인은 야간에 일하는 간호사여서 서로가 집에 있는 시간이 다르니 자기가 집에 없는 시간에 집을 대여한다는 것. 이용 시간을 정해놓고 같은 집을 시간대 나눠서 둘이 같이 쓰자는 말이다. 월세도 괜찮은 가격에 좋은 조건이지만, 집주인 남자와 동거(?)한다는 건 좀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든다. 다른 선택지가 없던 티피는 집주인 리언과 계약하게 되고, 시간차 동거를 시작한다.

 

서로가 '윈윈'하는 계약이었지만, 위험 부담이 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모르는 사람과 같은 공간을 쓴다는 것, 서로 성별이 다르다는 것, 취향이 다른 두 사람의 공간이 공유된다는 것, 누군가와 함께 사용하는 공간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 등 혼자 살 때와 다른 게 너무 많지 않은가. 같은 공간을 공유하다 보니 지켜야 할 게 많고, 나만의 공간이 아니니 여러 가지로 물어볼 것도 많은 게 사실이다. 서로 얼굴은 모르지만, 의사소통은 필요했다. 티피가 리언의 집에 들어온 이후로 두 사람의 의사소통은 쪽지였다. 집안 곳곳 발길 닿는 곳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적은 포스트잇 쪽지를 붙여놓는다. 세면대 진열장에, 냉장고에, 침대 옆에, 식탁 위에 등. 음식을 많이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고, 누군가에게 연락이 왔다고, 어느 공간을 어떻게 바꿨으니 이해해달라는, 정리되지 않은 짐의 처리 방식 같은 그 공간의 소소한 일상을 공유했다. 이 정도면 집주인과 세입자 사이의 온도가 괜찮지 않은가? 적당한 거리와 딱 필요한 내용만 주고받으면 되는 일. 참 심플하다.

 

그런데 말이다. 읽다가 보니 이 동거의 단점보다는 장점, 감정을 건드리는 설정이 눈에 들어오면서 자꾸 설렘설렘하더라. 21세기의 유럽이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남자와 여자의 만남이고, 서로에게 상처 주는 애인을 정리하는 것도 참 심플하게 느껴졌는데(리언의 경우), 왜 티피와 리언이 만들어가는 사랑은 아날로그 시대를 보는 것 같을까? 느려도 너무 느리다. 뭔가 말랑말랑한 게 피어오를 것 같으면서도, 조심스러워서 좀 더 살펴보다가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느껴진다. 좋게 보면 사람 함부로 대하지 않으려는 성격이고, 나쁘게 보면 답답해서 독자를 죽일지도 모른다. 그냥 핑계 하나 만들어서 서로 얼굴 보란 말이야~! 그러다가 둘이 얼굴을 마주하게 된 곳이 리언의 집 욕실이다. ㅋㅋ 티피는 어쩜 그렇게 타이밍도 잘 맞췄는지, 첫 만남이 훌러덩 다 벗은 누드 차림과 속옷 차림인 게 흔한 일은 아니잖아? 서로 민망한 꼴을 먼저 보고 시작했으니, 뭔가 급히 전개가 이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건 나뿐만이 아닐 터.

 

무엇보다 이 소설의 아날로그적 사랑법이 두근거리면서 다가왔던 건 둘이 주고받는 포스트잇 쪽지였다. 얼굴도 모르고 통화도 안 하는 두 사람은 집안에서의 쪽지와 급할 때 사용하는 문자였다. 말로 하면 몇 초 걸리지 않는 이야기들이 쪽지로 오고 가면서 차곡차곡 쌓인다. 소소했다. 사실 알고 보면 우리 일상이 그렇지 않은가. 하루하루 소소하게 살아가는 시간. 누군가와 종일 이야기했어도 정리하려고 보면 일상의 안부를 나누는 일이었다는. 티피와 리언이 처음에 나누는 메모는 집안의 정리나 서로에게 양해를 구해야 하는 일들이었다. 그러다가 점점, 서로의 일상을 작게나마 적기 시작하면서 상대의 안부를 묻기에 이른다. '리언, 괜찮아요?' 같은 걱정의 말, 출판사 편집자인 티피가 만든 책의 감상을 전하고, 일터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나누는 것도 두 사람 사이에 점점 커지는 일상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혀주며 상대의 마음을 읽고, 때로는 눈앞에서 마주하고 말할 때보다 더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수단인 편지의 힘을 확인한 것만 같다. 하고 싶은 말 실시간으로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 많은 세상에서, 조금 느리게 가더라도 전달되기만 하면 되는, 속도보다 진실한 마음에 중요함을 강조한 것 같아서 괜히 흐뭇해지기도 했다.

 

냉장고 문에 이마를 잠시 얹었다가 종이 쪼가리와 포스트잇 쪽지들을 손가락으로 훑어본다. 엄청난 양이었다. 농담, 비밀, 이야기, 두 사람의 인생이 천천히 펼쳐지고 있는 광경. 두 사람의 인생이 바뀌어가는 광경. 아니면 뭐랄까. 동시에 똑같이 바뀌는 장면이랄까. 다른 시간대, 같은 장소에서. (251페이지)

 

이 소설이 의미가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데이트폭력을 적나라하게 비추고 있다는 점이다. 티피의 전 애인 저스틴은 다른 여자가 생기고 같이 살던 티피를 내보낸다. 오히려 동거하는 동안 발생한 지난 비용까지 청구한다. 사귀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하는 일을 반복했다는 티피의 말을 듣고, 이런 놈과 헤어진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티피는 저스틴의 연락에 다시 그를 마음에 담으려고 한다. ? 저스틴과 오랜 세월 연애하는 동안 티피는 저스틴에게 가스라이팅 당하고, 그의 모든 말에 점점 수긍해가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 그의 말이 옳고, 사실을 왜곡해서 기억하게 하고, 강요와 압박으로 상대가 잘못했다고 결론짓고 인정하게 만드는 일들. 저스틴은 교묘하게 티피를 조종했고, 티피는 그것도 모른 채로 저스틴과의 반복되는 헤어짐과 연애에 익숙해진 거다. 물리적인 폭력을 쓰지 않았다고 저스틴이 티피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은 건 아니다. 저스틴과 연인으로 지내면서 티피가 얼마나 피폐해졌는지는, 그와 헤어진 후에 나타난 후유증과 같다.

 

 

한 사람은 전 애인의 감정적 학대에 속으로 무너져 내렸고, 한 사람은 내성적 성격에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하며 죽음을 일상으로 보면서 산다. 우울함이 내재하면서 언제든 극단적으로 치닫는 마음에 나쁜 선택을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 이런 두 사람이 한 공간에서 만났으니, 두 사람을 지켜보는 독자의 염려도 저절로 커진다. 그래서일까. 이 소설이 단순히 로맨스 소설로만 비치지 않는 이유, 어쩌면 연애의 시너지효과가 제대로 발휘한 예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티피와 리언은 진짜 연애와 사랑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줬고, 정신적인 아픔까지 치유되어 가는 것을 증명했다. 분명 사랑은 두 사람이 하는 것이지만, 두 사람의 주변에 있는 많은 것들에 영향을 받는다. 그런 것까지 아우르며 서로를 보듬을 수 있는 게 사랑하는 사람의 자격이 아닐까? 티피와 리언의 주변 사람들이 그들의 일상에 많이 등장하고, 그들의 한마디가 간섭이 아니라 관심과 사랑의 표현이기에 받아들일 수 있었다. 각자의 인생이지만, 또 같이 사는 인생이라는 것을 보여준 이들 때문에 흐뭇하다. 두 주인공뿐만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가 행복해지는 걸 보면서, 발랄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사람들 때문에 내내 웃으면서 읽었다.

 

"때로는 예전대로 사는 게 더 쉽게 느껴져요. 더 안전한 것 같죠. 하지만나는 당신이 해내는 걸 봤어요. 당신이 해낼 수 있는 일을. 당신이 얼마나 용감한지 봤죠.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요. 괜찮겠어요?" (441페이지)

 

눈물보다 웃음을 더 많이 기억할 수 있다면, 어제보다 오늘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면, 그 연애 괜찮은 것 아닐까? 그동안 로맨스 소설 읽어오면서 로맨스에 관해 나름의 정의를 여러 가지 세웠었는데, 어느 정도 현실에 맞게 떨어지는 정의는 '동반성장'이었다. 상대와 함께함으로써 내가 성장하는 기쁨을 맛보는 것, 동시에 상대방도 나와 함께하는 시간으로 더 발전된 인간으로 만족하게 되는 것. 그렇게 상대를 존중하고 공감의 존재가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연애가,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달콤함과 말랑말랑함에 인간미까지 얹어진, 로맨스와 자기 성장이 잘 어우러진 소설이었다. 홍보 문구의 한 문장처럼, 우리 시대에 어울리는 로맨스는 여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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