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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밤의 양들 [합본]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10월
평점 :
"인간이 신을 믿는 이유는 그 존재를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으리라. 가장 믿을 수 없는 대상을 가장 믿을 수 없을 때에야 인간은 비로소 믿게 되는 것이다. 신앙의 속성이란 그토록 얼빠지고 불합리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을 믿는 행위가 더욱 숭고한 것이 아닐까?"
유월절. 교회를 다니지 않지만, 많이 들어본 말이다. 그러면서도 그 자세한 내용에 관해 한 번도 궁금한 적이 없었다. 검색해서 찾아보니 상당히 긴 설명이 있지만, 간단하게 들려주는 것으로 보니 '유대교의 3대 절(節)의 하나. 봄의 축제(祝祭)로 이스라엘 민족(民族)이 애급(埃及)에서 탈출(脫出)함을 기념(紀念ㆍ記念)하는 명절(名節)'이라고 한다. 그러니 예루살렘 그 신성한 곳에서 유월절을 기다리는 이들의 마음은 들떠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만의 축제, 해방 같은 자유를 찾은 날이라는 생각에 이 축제를 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유월절을 일주일 앞둔 날 살인이 발생한다.
로마인 백인부장을 살해한 죄로 감옥에 갇힌 마티아스는 성전수비대 대장 조나단의 명령으로 살인사건을 추적한다. 사형을 앞둔 마티아스에게 이 살인사건의 해결은 죽음의 순간을 미룰 수 있는, 어쩌면 죽음을 모면할 최고의 기회였다. 평소 밀정 노릇을 하던 그에게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다니는 건 식은 죽 먹기. 성전에 피를 뿌린 이 살인 사건은 곧 다음 날 또 다른 살인 사건으로 연쇄살인이 된다. 마티아스의 부담도 커졌고, 사건 해결은 점점 미궁으로 빠진다. 이 연쇄살인을 추적하던 마티아스는 로마인 현자인 테오필로스를 만나게 된다. 테오필로스는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온 로마인 총독 빌라도의 지시로 이 문제에 나서게 된 것.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이의 지시로 살인 사건을 추적하지만, 결국은 같은 지점을 향해 간다는 이유로 공조한다. 하지만 사건의 실마리를 제대로 풀기도 전에, 세 번째, 네 번째 살인은 계속 이어진다.
누가, 무엇을 위해 저지른 살인인가. 사건을 하나씩 파헤칠 때마다 그들의 중심에는 갈릴리 출신의 예수가 있다. 사람들은 그를 스승님, 선지자라고 부른다. 그가 발걸음 하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또 하나의 종교가 만들어지는 건가 싶은 위험성도 보이지만, 사람들이 따르는 마음은 부정할 수가 없다. 사건에 연관되어 의심이 가는 이들을 추적하던 마티아스는 급기야 예수를 대면하기도 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살인자로 의심을 받고, 예수는 믿을 수 없는 말로 사람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정말 예수가 사람들이 기다리던 선지자란 말인가? 허름한 행색에 그저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인간으로 보이는 이자가 메시아가 될 수 있을까? 예수를 직접 만나고도 그 마음을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던 마티아스. 살인의 단서대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범인으로 지목할 것인지, 아니면 그가 보는 진실이 무엇인지 계속 찾아갈 것인지 궁금하다.
성경의 어떤 구절처럼, 소설인 이 이야기는 익숙하게 들어왔던 그 대목으로 흘러간다. 유월절을 앞둔 그때,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가고,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못이 박힌다. 아마도 예수는 자신이 그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손에 피를 흘리게 될 거라는 것을. 그런데도 왜 꼭 예루살렘으로 와야만 했을까. 그가 간절하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라도 있었던 것일까?
이미 소개 글에서도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읽다가 보니 성경 구절 그대로 듣는 수업 같은 느낌에 당황하기도 했다. 하지만 소설은 성경 구절 그대로를 들려주는 것 이상의 다른 이야기를 살핀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같이 처형당했던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가 왜 예수와 나란히 십자가에 못이 박히게 되었는지 말한다. 계속되는 살인 사건의 추적을 내세워 이미 사형에 처할 목숨을 부지하고 있지만, 아주 험난하게 인생 살아왔지만 구원의 순간을 경험해본 적도 없었기에, 이 목숨만 건질 수 있다면 그저 살아왔던 그대로 또 살아가는 것 말고는 아무 의미가 없었을 마티아스. 그가 파헤치던 살인 사건은 그에게 별 의미가 없다. 그저 그가 목숨을 건질 수도 있을 하나의 기회였을 뿐이다. 그렇게 사건을 향해 달려가던 그가 마주치는 어떤 순간 때문에 그의 마음은 서서히 변한다. 잔혹하고 불량하게 살아왔던 그의 인생에 어떤 메시지 하나씩 발견하면서 그는 죽음을 향해 간다.
그저 성경의 한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종교적 관심이 없는 이들은 이런 이야기조차 낯설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 당시의 예루살렘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어떤 긴장감으로 유지해나가는 곳이었는지 조금씩 보여주면서 사람들이 만드는 신앙의 힘을 묻게 한다. 살인사건의 진짜 범인을 찾았을 때 그에게서 듣는 살인의 목적은 너무 황당했지만, 어쩌면 그 시대의 한 모습을 확인한 것 같았다. 그렇게라도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와 쟁취해야만 했던 힘의 목적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묻고 싶기라도 했던 걸까. 로마의 다신교와 유대교의 유일 신앙이 충돌하면서, 또 다양한 종교의 의미가 복잡하게 작용하기도 했던 시대의 흐름을 읽게 한다.
그동안 우리가 성경에서 들었던 예수의 이야기였다면, 이 책은 살인자의 눈으로 바라본 예수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아였고, 열두 제자의 스승이었고, 하나의 종교를 떠올렸을 때 대표가 되는 이미지였다. 그런 그가 조금 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나님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고뇌했던 그의 마음이 읽힌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에게 전하는 그의 말들이 어쩌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행했던 일들이 아니라 인간적인 고뇌에서 비롯된 진심이 아니었을까 싶다. 본인이 직접 인간으로 겪은 시간의 모든 고난과 상념들이 인간을 보다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또 다른 추측이 계속 이어진다. 어쨌든 이 소설 한 편으로 성경의 모든 맥락을 다 이해하기는 어려울 테지만, 예수가 행한 모든 모습을 다 받아들일 수도 없겠지만, 하나의 종교를 보다 인간적인 접근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는 된 것 같다.
인간의 마음을 기대를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종교라고 생각했다.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는데, 예수가 죽음으로 보여준 인간의 선과 악, 용서나 구원이 남은 인간의 삶에 어떻게 작용했을지 궁금하다. 어쩌면 마티아스의 최후 선택이 그 답을 보여줬는지도 모르겠다. 죽음의 두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어떤 믿음 말이다.
"진실이라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