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머니 이야기 세트 - 전4권
김은성 지음 / 애니북스 / 201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엄마가 살던 집 마당에는 커다란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깨끗하고 시원한 물이 마른 적 없이 나오던 그 우물을 온 동네 사람들이 이용했단다. 마을 사람들은 물을 길으러 엄마의 집에 왔고, 외할머니는 사람들이 물을 길어갈 수 있게 종일 대문을 열어두고 사셨다고 한다. 별로 어려운 것 없이 넉넉하게 살았던 때였고, 외할머니는 사람들에게 뭐든 나눠주고 지내면서 인심 좋은 사람으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그랬구나, 외할머니는 그런 사람이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엄마는 한 마디 곁들인다. 종종 외할머니의 음식 솜씨를 칭찬한다.

"우리 엄마가 손으로 뭐든 조물조물해서 밥상에 올려놓으면 다 맛있었어. 궁중 요리도 아닌데 다 맛있었다니까. 나는 그런 맛이 왜 안 나는지 모르겠다."

엄마의 그런 외할머니를 기억나게 하는 옛날이야기는 이모를 만날 때 배가 된다. 엄마보다 언니인 이모 두 분, 미국에서 거의 5년에 한 번씩 한국에 들어오는 막내 이모, 엄마와 동갑인 나의 이종사촌 언니. 이 네 명이 만나면 아주 오래전, 내가 알지 못하는 시절의 이야기는 보따리를 풀고 다시 묶일 줄 모른다.

'그때 우리 엄마가 이랬어, 우리 옆집에 살던 아무개가 아직도 거기 살아? 올케언니가 왜 그렇게 미웠는지 몰라, 엄마가 얼마나 부지런하셨는지 쉬지도 않고 일하셨어, 엄마가 해주는 김장김치가 진짜 맛있었는데, 시래기만 넣은 된장찌개가 끝내줬어, 말하고 보니 진짜 먹고 싶다.'

이런 자리도 미국에서 이모가 들어와야 생긴다. 각자 살기 바빠 한국 땅에 있으면서도 서로 얼굴 볼 일이 집안의 경조사 말고는 없다. 그렇게 만나도 몇 시간 앉아있지 못하고 제 갈 길을 서두른다. 이렇게라도 서로 모여 옛날이야기 하면서 그리워하는 시간이 얼마나 더 있을까. 지나간 시간, 부를 수 없는 엄마를 그리워하는 얘기들. 언젠가 내가 겪게 될 순간들.

 

9남매인 엄마의 형제는 네 분이 미국에서 사신지 거의 오십 년이 다 되어가고, 나머지 다섯 명이 한국에서 사는데 모두 돌아가시고 이제 엄마와 이모 두 분이 남아계신다. 칠순 팔순을 넘어선 이 세 여인은 이제 서로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서 종종 안부를 물으며 한 시간 넘게 통화를 하신다. 그러니 나도 모르게 생긴 버릇이 있다. 내 기억에 없는 외할머니 얘기를 할 때마다, 궁금증보다는 어떤 의무감으로 엄마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자식들 다 멀리 나가서 살고 유일하게 남은 엄마와 내가 동지처럼 지내는 관계이기도 해서 그렇지만, 언젠가 내가 그리워할 엄마를 떠올리면, 엄마도 엄마가 그립지 않겠는가. 종종 '외할머니는~, 예전에 아무개는~' 하고 시작하는 엄마의 이야기에 바쁜 일 잠시 내려놓고 엄마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때마다 나는 한 마디만으로 엄마의 말문을 열다.

"응, 누군지 모르지만 일단 이야기를 해보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저자의 엄마는 일본군 위안부 징집을 피하려고 아버지와 결혼했다. 엄마는 아버지가 그렇게 싫었다고, 그러니 그 결혼을 얼마나 피하고 싶었을까. 그런데 말이다. 인생이 참 아이러니해서일까, 아버지와 결혼하고 5일 만에 해방이 되었다고 하니 이렇게 슬픈 일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아이고야, 땅을 치면서 후회했을 것 같다. 5일만 더 버틸 것을... ㅠㅠ) 이어지는 한국 전쟁으로 엄마의 가족 일부는 남한으로 피난으로 오고 정착한다. 남은 형제와 부모가 이북에 살고, 오빠와 남한에 살게 된 엄마의 삶은 그 시대의 분위기처럼 평탄하지 않았다. 전쟁 후의 나라는 혼란스러웠을 것이고, 사람들의 생활은 팍팍했을 것이다. 건축 일을 하는 오빠가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었지만, 노름과 술을 즐기던 아버지의 무책임까지 대신하느라 엄마는 뭐든 하면서 자식들을 키워야 했다. 식당, 문방구, 신발 장사, 떡도 팔았다. 그런 고생에 어쩌다 한번 나갔던 꽃놀이가 일상의 활력소가 되기도 하는 삶을 보낸 엄마였다. 사는 게 힘들고 어려웠지만, 사람 사귀기를 좋아했던 엄마의 성격은 정이 넘쳤다. 어려운 형편에도 다른 이들에게 나눠주고 함께 먹기를 즐겼던 푸근함이 엄마에게 있었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인심도 잃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어려운 살림에 많은 자식을 다 키워내고 가정을 이끌 수 있었겠지. 그런 엄마와 저자가 오십 여년의 세월을 함께해온 이야기다. 저자가 엄마와 함께했던 기억을 소환하고, 기억에 없는 부분은 엄마의 이야기로 채워졌다.

 

읽으면서 자꾸만 옆에 있는 엄마를 쳐다보게 되는 그 마음을 뭐라고 표현할 방법이 없다. 저자의 엄마와 비슷한 나이를 지나는 우리 엄마도 이렇게 살아왔겠구나 싶어서 안쓰럽고, 여전히 엄마가 해주시는 밥을 먹고 사는 게 미안하기도 하다. 엄마가 필요로 하는 부분을 내가 채워주는 게 분명 있겠지만, 엄마가 나를 채워주는 게 더 많다는 게 사실이니까. 한편으로는 언제 또 이렇게 엄마의 이야기를 들을 시간이 생길까 싶기도 해서 울컥해진다. 아마 저자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엄마와 이렇게 지난 세월을 이야기하면서 기록하고, 몰랐던 엄마의 시간을 듣고 지금의 엄마를 이해하게 되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세월을 그리워하는 엄마의 삶을 알듯 말듯 다가오는 감정 때문에 말이다. 그런 엄마의 삶은 지금 저자의 인생과 연결되어 있다. 이 책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엄마의 성장기와 엄마의 결혼 후 생활이 대부분이다. 4권 중반 이후로 저자의 이야기가 들려오긴 하지만, 엄마의 이야기에 자연스레 이어지는 자식(딸)의 이야기다. 엄마의 엄마가, 엄마가 없었다면 시작되지 못했을, 엄마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드러나지 않을 감정을 담은 이야기다. 세상 둘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엄마이지만, 모든 자식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었겠지. 부모와 자식 간에 항상 좋을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싸우고, 멀어지고, 원망하는 대상이 되기도 했던 엄마가 이제는 힘을 잃고 자식에게 마음을 의지한다. 자식의 아픈 일을 더 슬퍼한다. 그런 엄마의 기억이 사라져간다. 이 책이 완성되어야만 했던 이유는 그렇게 사라져가는 엄마의 기억을 붙잡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내 고향집이 한번 가보깁다.

만약 고향이 간다면 모(묘)를 파헤쳐 뼈를 만지보면 좋겠어.

우리 나고(낳고) 키운 어머니...

 

입소문으로만 듣던 이 책을 직접 만나는 게, 기쁜 일이라기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제목에서부터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가늠이 되기 때문이다. 세상 어떤 엄마의 이야기가 남의 일처럼 들려올까 싶기도 하고, 마흔이 넘어 엄마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야겠다는 저자의 다짐 같은 게 느껴져서이기도 하다. 이상하게도, 엄마와 아들 사이에서도 그렇겠지만, 엄마와 딸은 그 감정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관계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더 겪어갈 감정이기도 하고, 저자가 나보다 앞서 겪어온 것이어서 더 무게감 있는 이야기로 들렸다. 엄마가 세상 더 없는 존재이기도 했다가, 가장 미워하고 증오하는 대상이 되기도 했다가. 그러면서도 엄마와 함께하고 싶고 엄마를 이해하는 일을 멈추고 싶지는 않기에, 이런 이야기를 멀리할 수는 없었다. 이 책 속의 엄마 이야기는 한 여자의 생애이기도 하고, 그 개인의 삶 속에 녹아든 한국의 역사이기도 하다. 친가와 외가 구분 없이 사용하던 호칭이 애매하게 들리고, 낯선 함경도 사투리나 풍습들이 백여 년의 시차를 느끼게 하면서도 생생하게 들린다. 듣기 어려운 북녘의 삶이 이렇게 그려지면서, 어김없이 그 안에는 엄마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그리워할 대상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바로 옆의 엄마를 다시 보게 한다. 그 무엇이든, 이 책은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사는 모든 이에게 엄마의 삶을 조금 더 이해하고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이야기라는 건 분명하다.

 

한 사람의 인생은 그 사람의 역사가 된다. 그러니 그 사람을 가장 잘 아는 방법은, 그 사람을 직접 경험하거나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을 듣는 것이다. 그 상대가 가족이든 친구든 애인이든, 그 누가 되었든 그 사람을 잘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한다. 사십 여년을 함께 살아온 엄마를 내가 지켜보고 겪어왔지만, 엄마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엄마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 나니 알겠다. 저자가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며 이 만화를 완성해낸 것처럼, 내가 모르는 시간의 엄마를 이해하는 방법 역시 엄마가 지나간 시간을 듣는 일이다. 엄마가 가끔 꺼내는 외할머니 이야기나 이모들을 만났을 때 꺼내는 이야기들, 예전에 알고 지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귀하게 들려오는 건 내가 엄마를 더 많이 알고 싶고 계속 사랑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엄마가 궁금해질 때마다 묻는다. 엄마의 처녀 시절부터 아끼던 재봉틀은 어디로 갔는지, 왜 큰 외삼촌을 따라 미국에 가지 않았는지, 어쩌다 아버지와 결혼했는지, 힘들었던 그때 우리를 버리고 나갔는데 왜 돌아왔는지 같은 이야기를 꺼내며 엄마의 기억을 자꾸만 소환한다. 단순히 기억을 읊는 게 아니라 감정까지 실어 들려오는 엄마 목소리에 엄마의 자식으로 태어난 게 미안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어쩌랴. 이미 엄마와 딸로 운명 지어진 것을 거스를 수가 없으니...

 

 

"엄마! 웅우우"

"왜, 너무 이뻐서리 꼬집어주고 싶니야?"

"어릴 때 엄마가 이렇기 궁둥이 두드려주고 그랬는데 이제 내가 그러네."

"이제 내가 엄마네. 내가 엄마야." 

 

엄마와의 남은 시간을 같이, 더 잘 보내야겠다는 막연한 다짐을 계속하면서 4월을 기다린다. 추위를 많이 타는 엄마가 기다리는 봄이기도 하고, 4월에 엄마와 함께 제주도에 가자고 작년 12월에 여동생 네와 미리 예매해 두었다. 귀찮다고, 괜히 너희 돈 쓴다고 싫다고 손사래를 치면서 거절하시더니, 막상 가고 싶기는 하신 것 같다. 제주도 가면 많이 걷고 많이 봐야 하니까 힘들면 안 된다고 요즘 저녁마다 동네를 걸으시며 운동하신다. ^^ 생각해보면 엄마와 여행다운 여행을 한 적이 거의 없다. 식구들 다 모이기도 힘들지만, 꼭 움직여야 하는 일이 아니면 엄마가 선뜻 길을 나서지 않는다는 이유로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엄마와 함께할 기회를 너무 많이 미루기만 한 것 같아서 아쉽고 속상하지만, 그런 후회는 잠시 넣어두기로 한다. 이번 여행이 엄마와의 마지막 여행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조금씩 여행준비를 하는 즐거움으로 엄마가 많이 설레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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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9-02-11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의 ‘내 어머니 이야기‘도 재미있어요. 여행기도 기다려집니다. 어머니! 건강하셔서 펄펄 즐겁게 걷고 오셔요~

구단씨 2019-02-14 20:47   좋아요 0 | URL
걱정하면서도 설레면서 기다리시는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