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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1책 인문학 세계 고전
사사키 다케시 외 83명 지음, 윤철규 옮김 / 이다미디어 / 2025년 6월
평점 :
한 권의 책이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는 점은 우리의 독서 의욕을 북돋웁니다. 인문이란, 사람의 본성과 사회의 작동 원리, 감정과 이성의 핵심을 통찰하여 우리에게 많은 지혜를 일깨웁니다. 그래서 기술 서적, 공학 서적처럼 직접적인 효용을 전달하지 않아도 수백 수천 년 동안 읽히는 게 고전입니다.
(*북뉴스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5 이하에는 고(故) 송자(宋梓) 교육부 장관의 추천사가 나옵니다. 책에는 직함이 연세대 총장(前)이라고만 나오지만 대한민국 교육부 장관, 명지대 총장도 지내신 분입니다. 활동을 많이 하셨기 때문에 연대 총장들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분입니다. 6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특강 오셨을 때 접한 그 맑고 깊은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히 들리는 듯합니다. "누군가가 나더러 이 책과 고전 한 권 중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이 책을 고를 것이다." 그만큼 이 책의 완성도가 높다는 뜻인데, 집필진 중 사사키 다케시[佐佐木毅] 전 도쿄대 총장도 포함되어 있고, 압축된 문장 안에 깊이 있는 통찰과 해설이 담겨, 이 책이 단순한 요약서가 아니며 문사철(文史哲)의 참된 경지로 독자를 이끄는 가이드라는 평가가 암시됩니다.
미국은 1776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세계에 유례가 없던 공화정을 꾸려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민주정, 공화정은 천 수백 년 전 그리스, 로마에도 있었지만 성문 헌법을 따로 만들고 삼권을 분립하며 대통령도 권한 행사를 이성적으로 자제하는 풍조는 여태 인류사에 없었습니다. 프랑스 사람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쓴 <미국의 민주주의>는 이 신생국의 훌륭한 정치를 잘 분석했을 뿐 아니라, p110을 보면 현대 대중 사회의 모습을 예견이라도 한 듯, 중산 계급이 주동이 되어 무난하게 중지(衆智)를 모아 가는 모범적인 정치를 차분하게 서술하는 놀라운 대목도 있다고 지적합니다.
같은 사회계약론이라 해도 홉스, 푸펜도르프 등은 복종 계약을 전제로 논의를 편 반면, 장 자크 루소는 "주권자인 국민의 형성 행위(p45)"가 담론의 중핵이 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납니다. "본능에서 정의로, 충동에서 의무로, 욕망에서 가치로"라는 루소의 논의는 사실상 현대 민주주의, 주권재민 사상, 자유와 다양성의 존중 등 핵심 가치의 창안지점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회 계약 하에서 사람들은 종래의 불안정하고 들쭉날쭉한 자연인들이 아니라 일반 의지(volonte generale)의 영도 하에 새로운 법인격을 부여받는다는 그의 서술은 언제 읽어도 박력이 넘치고 심오한 울림을 유지합니다.
고전파 경제학의 창시자는 애덤 스미스, 이를 발전시키고 내용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 이는 데이비드 리카도입니다. 리카도는 오늘날 세계인 모두가 추구하려 노력하는 자유무역의 효용과 비교우위론을 정초한 천재였습니다. p171을 보면 J S 밀(Mill)이 논의되는데 그는 천재였던 아버지 제임스 밀로부터 광범위한 지식을 교육받았고, 근대 사회를 이끌어갈 대원칙, 철학적 원리를 다듬는 데에 독자적인 기여를 남겼습니다. 재미있는 건 선배 격인 스미스나 리카도는 "가치론"을 중시했는데, 밀은 특유의 통찰력으로 가격 이론이라는 도구가 앞으로 가치론을 대체한다고 내다봤던 것입니다.
사자의 강한 이빨과 턱, 악어의 재생력 강한 껍질이 없었으나 인간은 생각하는 힘 하나로 만물의 영장이 되었습니다. p330 이하에 나오는 <팡세>를 저술한 파스칼은 "한없이 연약하지만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서 위대하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칸트는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종합한 업적으로 유명한데, p337의 설명을 보면 "순수 이성이라고 할 때의 '순수'는 경험이 개재하지 않은, a priori(선험적인)한 상태"라는 그의 유명한 규정이 인용됩니다. "근대 과학의 대자화(對自化)를 표방하지만 지식만능주의는 아니"라는 책의 설명에서 엄청난 공력이 느껴집니다. 이런 시원시원하고 정확한 문장들 때문에 송자 교육부장관께서 그렇게 좋아하셨나 봅니다.
이성만능의 차가운 근대철학에 대한 반동으로, 생의 강력한 의지를 중시하는 니체 같은 철학자가 등장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시적(詩的)인 문장으로도 유명한데 "내 적들은 강력해졌고 내 가르침의 초상은 왜곡되어 버렸다(p377)"라며 산을 다시 내려가는 거인의 내러티브를 장엄하게 낭독하는 니체 영혼의 위엄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구태여 저자들이 이 대목을 인용한 건 나중에 히틀러 세력이 니체의 사상을 잘못 끌어대어 프로파간다에 활용한 사실을 환기하는 듯도 합니다.
보통은 정치 사상, 철학의 조류 등을 요약 설명하는 데 그치지만 이 책은 마지막 5장에서 역사, 종교 분야애서의 명저까지 소개합니다. 에드워드 기번, 토인비, 알베르 마티에 등의 명저 소개는 책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대목만 읽어도 세계사 일부가 잘 요약되어 독자의 머리에 안착할 만큼 재미있고 유익합니다. 번역자 윤철규 대표가 권말에 쓴 후기는 "교양"이라는 말의 의미가 이 혼란스럽고 천박한 21세기에 어떻게 변용, 승화, 재구축되어 독자와 마주할지에 대해 깊은 생각의 여지를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