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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행복 -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 정원을 걷다 ㅣ 열다
버지니아 울프 지음, 모명숙 옮김 / 열림원 / 2025년 5월
평점 :
p4에 나오듯이 독일어로 된 책이 원서입니다. 그래서 번역자도 독문학자 모명숙 박사입니다. 영국인 버지니아 울프가 쓴 여러 글들(당연히 영어 원문)을 편집(번역)했고, 일기, 편지, <제이콥의 방>, <세월>, <존재의 순간들>, <등대로> 등이 그 출전입니다. 편집자는 유타 로젠크란츠라는 여성이며, 독일어 원제는 Eines jeden Glück, 즉 "모두의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자신만의 방"이라는 어구와 묘하게 대구(對句)를 이룹니다. eines jeden은 ein jeder의 2격(속격. genitive)이며 영어로 옮기면 each and every와 의미 면에서 약간 비슷합니다(문법적 기능은 다름).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의식의 흐름으로 유명하니 그녀의 이름만 들어보고 20세기 전반의 그 고전들을 아직 안 읽은 독자라면 아주 난해한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로 오해할 만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책이 보여 주는 대로, 그녀는 섬세하고 감성적인 이야기를 조근조근 풀었던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 책은 지인, 편집자, 동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상당 부분을 발췌했기 때문에 더욱 그런 다정다감한 면모를 많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의 부제는 (역시 독일어로) Mit Virginia Woolf durch den Garten인데, 이 번역본은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 정원을 걷다"로 옮깁니다. durch den Garten은 "정원을 거쳐, 통해" 정도의 뜻이겠는데 그래서인지(?) 책 중에는 정원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예를 들면 p57에서, "비가 내리고 난 후 기운차게 핀 자두꽃"에 대해 쓴 대목이 그렇습니다. 꽃은 연약하기 짝이 없지만 가장 아름답게 대지를 수놓습니다. 여성들이 꽃 선물을 받으면 좋아하고 꽃의 본성을 닮으려 애쓰는 건 그 본능 안에 내재된 동기가 있어서입니다. 사람인 이상, 생명체인 이상 꽃을 싫어할 수 없습니다.
p131에서 p142까지는 <올랜도>의 일부가 인용됩니다. 버지니아 울프 이후에도 프랑스 페미니즘의 시조새 시몬 드 보부아르가 지은 <모든 인간은 죽는다>도 비슷한 내용을 다뤘습니다. SF 같은 건 아니고 성별의 전환 문제에 대해 깊은 고찰과 사색이 담긴 명작인데 책에서는 그 혹은 그녀 올랜도가 서펜타인 호수에서 책을 공물로 파묻는 유명한 장면이 인용되네요. 그런데 잰 모리스(버지니아 울프에게는 손녀뻘이었던)가 편집한 <버지니아 울프와의 여행>에서 재인용한 편지에도, 저 서펜타인 호수가 배경으로 등장하여 묘한 기시감을 줍니다.
2차 대전은 히틀러라는 광인과 일부 추종세력이 일으켰다고 하지만 1차 대전은 명백히 독일 민족, 또 오스트리아의 상당수가 열렬한 민족주의적 지지를 실었던 대규모의 충돌이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30대 초중반이었던 때 치러낸 전쟁은, 가뜩이나 신경쇠약이었던 그녀에게 엄청난 공포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리젠트 파크에서 전후(戰後)의 감상을 담은 p182 이하의 글들은 이무렵 그녀가 얼마나 마음의 깊은 상처를 입었으며, 자신도 조심스러워하며 이를 치유하는 과정을 잘 보여 줍니다.
<제이콥의 방>에서는 스튜어트 오몬드 씨와 키티 크레스트의 묘한 만남과 소통이 독자의 관심을 끄는데 p235에 나오듯이 국화가 최악이라는 문장이 유명하죠. Chrysanthemums are the worst. 이유는 바로 다음에 나오는데 세계 어느 누구라도 국화라는 꽃을 알면 다 공감할 만한 내용입니다. p254에서는 글라디올라스와 달리아에 대해 단상을 피력하는데 무심한 하늘, 교만한 꽃들에 대한 푸념도 재미있습니다(<질병에 대하여> 중), p287의 <막간> 인용문에서는 야생란에 대한 꼼꼼한 관찰이 엿보입니다.
같은 문장들이라도 어떻게 배열되고 무슨 주제에 편입하냐에 따라 의미가 새롭게 읽히는 체험이었습니다.